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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12 18:34 수정 : 2017.07.12 20:59

전우용
역사학자

서민적인 중국 음식점에는 대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붙어 있는 메뉴판이 있다. 위쪽이 ‘요리부’, 아래쪽이 ‘식사부’다. 요리와 식사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은 결코 아니지만, 이 분류는 음식에 대한 대중의 직관적 구분법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즐기는 음식과 때우는 음식.

신분과 계급이 출현한 이래 위쪽에 속한 사람들은 그 구분선을 명료히 긋기 위해 여러 수단과 도구들을 발전시켜 왔던바, 음식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료, 조리법, 가짓수, 식기와 식탁에 이르기까지 ‘먹는 행위’는 자체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일이었다. 사냥한 고기와 가축 고기, 흰 빵과 검은 빵, 쌀밥과 잡곡밥 등은 차별적 세계를 충실히 대표한 상징물들이었다.

“이밥에 고깃국 한 번 배불리 먹어봤으면”은 아주 오랫동안 한국 서민들의 보편적 염원이었다. 하지만 잡곡밥에 된장국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밥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때도 많았다. 이른바 ‘보릿고개’를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밥과 초근목피의 중간에는 피, 기장, 감자 등의 구황작물이 있었다. 이들을 주재료로 삼은 음식에 관한 한,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다’가 정답이었다.

한국에서는 6·25 전쟁 때부터 20~30년간, 수제비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의 ‘별미’로 탄생한 이 음식의 이름은, 손으로 접는다는 뜻의 수접(手摺)이 변한 것이다. 밀가루, 소금, 물, 된장만 있으면 다른 재료나 도구 없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기에, 1970년대까지도 수재민 임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수제비만 먹으며 며칠씩 버티곤 했다.

이제 수제비에서 피난민 수용소나 수재민 수용소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온갖 맛난 것들이 방송화면과 거리를 뒤덮고 있는 오늘날에도, 수제비의 후예들에 의지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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