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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구세군 자선냄비

등록 2017-12-06 18:21수정 2017-12-06 19:25

전우용
역사학자

1907년 8월1일 오전, 일본군의 지휘 감독하에 한국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은 자결했고, 일부 군인도 소집 명령에 불응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패퇴한 한국군 병사들은 성 밖으로 흩어져 의병이 되었다. 일본군은 전사한 한국군 병사들의 시신을 동대문 옆 성벽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08년 10월1일, 영국 구세군 선교사 로버트 호가드 정령 일행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은 선교 시작 열흘 만에 수천 명의 입교자를 모으는 기적적인 성공을 거뒀다. 성공의 비결은 구세군을 곡해한 한국인들의 정서에 있었다. 구세군은 조직과 활동의 모든 면에서 군대식 편제와 용어를 썼다. 선교사들의 직함은 사령관, 연대장, 대대장, 정령, 부령, 참령 등이었고, 선교계획은 작전, 선교행위는 전투, 헌금은 탄약이라고 했다. 영어에 서툴렀기 때문인지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통역은 구세군의 이런 특징을 한국인들의 정서와 결합시켰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보혈속죄’라는 말에서 민영환과 박승환 등을 연상했다. 그들은 구세군에 입교하면 진짜 총과 탄약을 나눠주는 줄로 알았다. 그들에게 목숨 걸고 맞서 싸워야 할 마귀는 다름 아닌 일본군이었다.

구세군 입교자의 급증세는 일본 경찰이 통역을 잡아들이고 호가드 일행에게 경고한 뒤에야 멈췄다. 구세군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기라도 하려는 듯, 빈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의 자선 활동에 특히 열심이었다. 1928년 12월21일, 서울 시내 몇 곳에 구세군 자선냄비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지금까지 구세군 자선냄비는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기 구실을 겸했다.

흔히 ‘선량’(善良)을 묶어 쓰지만, 선은 베푸는 마음이고 양은 지키는 마음이다. 양심을 지키며 살기에도 버거운 세상이지만, 남에게 베풀 선심이 아직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물건이 있다는 건, 세상과 이웃과 나 모두를 위해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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