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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화학비료

등록 2019-08-13 17:32수정 2019-08-13 20:02

전우용
역사학자

1936년의 어느 날,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60대 초반의 남자가 조선호텔에 들어가려다 정문을 지키던 수위에게 제지당했다. 수위는 그런 차림으로 조선 최고의 호텔에 입장하려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며 면박을 주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조선호텔을 찍어 누를 만한 호텔을 새로 짓겠다고 다짐하며 돌아 나왔다. 이태 뒤, 조선호텔 바로 뒤에 조선에서 가장 높은 8층짜리 반도호텔이 위용을 드러냈다. 호텔을 지은 이는 조선 제일의 재벌로 명성이 자자했던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였다.

도쿄 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노구치는 1923년 일본에 암모니아 합성공장을 설립했다가 사업 기반을 조선으로 옮겼다. 1927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흥남에 공장을 건설한 뒤, 이를 모기업으로 삼아 조선을 대륙 침략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일본 군부와 결탁하여 군수산업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장진강, 부전강, 수풍 발전소와 조선화학㈜, 조선마그네슘금속㈜, 조선석탄공업㈜, 조선금속제련㈜ 등을 거느린 ‘일본질소 콘체른’은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닛산(日産) 등과 더불어 일본 굴지의 재벌로 성장했다.

노구치의 조선질소비료㈜는 이 땅에 본격적인 화학비료 시대를 열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꽤나 오랫동안 화학비료는 ‘돈 주고 사서 쓰는 비료’라는 뜻의 금비(金肥)로 불렸다. 분뇨와 재, 볏짚, 낙엽 등을 섞어 썩혀 만든 두엄은 퇴비(堆肥)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화학비료는 일제 강점 무렵부터 사용되었으나 보급 속도는 더뎠다. 1915년의 경우 총생산액 1100여만관(貫), 99만원에 불과할 정도였다. 당시의 화학비료는 주로 정어리 기름으로 만들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면서 정책적으로 화학비료 사용을 강요했고, 지주들도 이에 동조했다. 노구치는 총독부가 강압적으로 시장을 확대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조선에 화학비료 공장을 세웠다.

근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이 각광 받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 화학비료 없이 안정적으로 농작물을 공급할 수 있는 농지는 거의 남지 않았다. 화학비료 성분이 축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현대인의 몸은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의 몸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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