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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6 16:20 수정 : 2019.06.27 15:07

경찰이 농성 중인 철거민들의 강제진압에 나선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 3가 남일당 망루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더(The) 친절한 기자들
“당시 경찰지휘부 조기 진압 결정, 다수 인명피해 야기한 한 원인”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 사과 권고에도 9개월째 침묵

경찰이 농성 중인 철거민들의 강제진압에 나선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 3가 남일당 망루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수감 생활 내내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졌어요. 저를 포함해 징역형을 받은 8명은 4~5년 형을 받았지만 어쨌든 살아있잖아요.” 지난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 용산참사 생존자 김아무개(49)씨는 생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09년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김씨는 3년9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2012년 10월 가석방됐습니다. 그의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당시 진압 과정에서 망루에 큰불이 났고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숨졌습니다. 검찰은 “망루 속이 어둡고 연기가 자욱했고 철거민들이 복면을 하고 있어 화염병 투척자를 특정하지 못했다”면서도 철거민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에 의해 불이 났다며 사망 사고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돌렸습니다. 숨진 5명 역시 특공대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공모자가 됐습니다. 진압을 결정하고 명령했던 경찰 가운데 참사의 책임을 진 사람은 1명도 없습니다.

지난해 9월에야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경찰 지휘부의 조기 진압 결정이 본 사건에서 다수의 인명 피해를 야기한 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에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9개월째 침묵하고 있습니다. 진상조사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경찰이 용산참사로 숨지거나 다친 철거민과 순직한 특공대원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짚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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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사 이전에도 경찰은 철거용역 위협 묵인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남일당 건물이 있던 용산4구역은 2004년부터 시작된 용산 역세권 재개발 지역 16곳 가운데 개발이익이 가장 큰 곳으로 꼽혔다. 상가가 밀집된 핵심 상권 지역이었던 탓이다. 상가 세입자들은 용산구청과 시행사 등을 상대로 현실적인 보상과 이주대책을 요구했다. 숨진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남일당 건물에서 1996년부터 중국음식점 ‘공화춘’을 운영했다. 그는 참사 이후 검찰 조사에서 “13년 전 식당을 인수할 때, 당시 돈으로 1억2000만원이 들었는데 식당을 철거하면서 보증금까지 합해 6500만원을 준다고 했다. 그 돈을 받고는 도저히 철거에 찬성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세입자들이 버티는 사이 삼성물산, 포스코 등 시공사는 철거업체를 내세워 영업 중인 상가 건물을 포함해 용산4구역 상가 세입자들에 대한 퇴거작업을 강행했다.

철거용역은 용산4구역에 상주했다. 특히 음식점 주변에 음식물 쓰레기를 뿌리거나 죽은 고양이와 비둘기를 가져다 두기도 했다. 일부는 속옷 차림으로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암시하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철거용역의 횡포에 대한 112신고는 모두 28건 있었는데 당시 경찰은 19건(67%)을 현지 계도와 현장 정리 수준에서 종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소해도 불기소에 그쳤다. 진상조사위는 “철거용역이 철거민들에 대하여 폭언, 폭행, 업무방해를 하고 신고가 이뤄졌지만 경찰이 재발 방지를 위한 엄중한 조치 대신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던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철거민 32명은 2009년 1월19일 새벽 3시부터 남일당 건물로 들어가 같은 날 새벽 5시부터 옥상에 망루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은 외부세력을 차단한다면서 남일당 건물 출입을 막고 있었는데 철거용역의 출입은 막지 않았다. 건물로 들어간 철거용역들은 계단 부근에서 폐자재, 쓰레기 등을 태워 옥상으로 연기를 올려보냈다. 철거민들의 119신고로 용산소방서에서 출동했다. 당시 출동한 소방관의 말을 종합하면, 경찰에게 철거용역이 낸 불을 끌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지만 경찰이 협조해주지 않아 그대로 철수했다고 한다. 철거용역은 남일당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철거민들을 향해 소방호스로 물포를 쏘기도 했는데 이때 경찰은 이들을 제지하는 대신 남일당 쪽에서 날라오는 돌 등을 막아주며 철거용역과 공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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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성 시작 25시간 만에 작전 개시…명분이 부족했다

진상조사위는 “당시 경찰은 철거민들과의 충분한 협상 노력 없이 철거민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만인 1월20일 새벽 6시30분께 진압작전을 개시했다”며 그 이유로 크게 2가지를 들었다. 먼저 당시 이명박 정부의 집회·시위에 대한 강경 기조다. 진상조사위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집회’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집회·시위를 ‘단순 진압이나 질서 유지’ 차원이 아닌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경찰력의 대응도 ‘불법 엄단’의 강경 기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당시 경찰지휘부가 철거민들을 협상의 여지가 없는 진압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도 한몫했다.

당시 현장 상황은 긴급 진압을 할 정도로 급박하고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월19일 낮 12시께 이후부터 화염병 투척이 중지됐고 인근 한강대로의 교통도 정상 소통됐다는 것이다. 남일당 건물 주변 상가 13곳은 영업 중이었고 심지어 정보관들은 철거민들과 협의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경찰지휘부는 현장대책회의를 열고 조기 진압 및 경찰특공대 투입을 결정했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위는 “경찰은 최후적·보충적으로 농성 현장에 투입돼야 하고 그 경우에도 안전 보호 조치를 모두 갖추고 진압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며 “조기 진압 결정은 안전대책을 충분히 마련하기 어렵게 했고 경찰지휘부의 이러한 결정이 본 사건에서 다수의 인명피해를 야기한 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한 시민이 2009년 1월30일 오후 서울 용산참사 현장에 내걸린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후보자의 얼굴이 인쇄된 펼침막을 제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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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전대책은 미흡, 사전예행연습도 없이 무리한 진압이 시작됐다

1월19일 밤 11시30분,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전철연 한강로3가 남일당빌딩 점거농성장 진입계획서’를 승인, 결제했다. 이 계획서를 보면, 김 전 청장 등 경찰지휘부는 망루에 신나, 화염병 등 인화성 물질이 있고 철거민들이 강하게 저항할 가능성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에 계획서는 ‘우발 대비’ 사항으로 고가 사다리 4대, 소방차 6대, 크레인 2대 등을 설치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크레인은 1대만 왔고 고가 사다리는 현장에 오지 않았다. 계획서는 ‘작전 개시 전 사전예행연습을 하도록’ 명시했지만 경찰특공대는 김 전 청장이 계획서를 승인한 지 불과 3시간만인 20일 새벽 3시 출동 명령을 받았다. 사전예행연습을 할 시간이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한편, 경찰특공대는 망루의 위험물질 상황에 대해 용산경찰서나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정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진압 전 망루 구조 등을 확인하지 않았고 이를 특공대에 전달하지도 않았다. 결국 특공대원들은 신나 등의 양과 위치, 망루 내부구조 등 현장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망루 진입 작전에 투입됐다.

진상조사위는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이 별도의 안전조치를 취하거나 안전대책 마련을 위해 진압 작전을 연기, 변경하지 않고 진압작전을 강행해 국민의 생명·신체를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용산구 한강로3가 ‘남일당 빌딩’에서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서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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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차 진입 뒤 이미 작전 정상적 수행이 불가능했는데도 2차 진입 ‘강행’

1월20일 새벽 6시30분, 진입 작전이 시작됐다. ‘전철연 한강로3가 남일당빌딩 점거농성장 진입계획서’는 망루 진입 순서를 ‘옥상→창문침투조→지상진입조’로 정해뒀다. 하지만 고가 사다리차 등이 오지 않자 경찰은 망루 계단에서 위쪽으로 진압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작전을 진행했다. 아침 7시5분 1차 화재가 발생했다. 7시7분 컨테이너에 타고 있던 특공대가 망루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7시15분 컨테이너가 망루에 충돌했다. 망루 안 2층과 3층 사이 계단이 무너졌다. 특공대는 일단 철수했다. 계단이 무너지면서 신나 등 유류물이 흘러내렸다. 이 와중에 망루를 향해 계속 물을 뿌리면서 망루 1층과 옥상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차올랐다.

7시20분 2차 진입을 하기 전 이미 망루 안에 휘발성 물질이 가득 찼다. 심한 냄새와 유증기로 인해 특공대원들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진상조사위는 “사실상 작전의 정상적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특공대는 위험 상황을 제거하는 조처를 하거나 작전 재수립·변경을 하지 않고 2차로 재진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교신기록을 보면, 경찰지휘부는 망루 상황에 대해 보고하도록 요청하기보다 “신속한 검거”를 위해 계속해서 진압작전을 강행하는 지시를 했다. 7시21분 망루 안에서 2차 화재가 발생했다. 7시25분 망루 전체로 불이 번지면서 망루는 붕괴했다.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화재 발생과 인명피해 발생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면서도 2차 진입을 강행한 것은 철거민들과 특공대원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도외시한 무리한 작전 수행이었다”고 밝혔다. 덧붙여 진상조사위는 “경찰지휘부는 1차 진입 뒤 유증기 등으로 화재 발생 위험이 고도화된 상황 등을 보고받았다”며 “그런데도 김 전 청장을 비롯한 당시 경찰 지휘부들은 용산참사 진상 규명에 협조하지 않고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2016년 1월20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 모란공원에서 용산참사 7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참가자들이 추모 리본을 달고있다. 남양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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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철거민만 기소’ 재판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여론전 열 올렸다

진상조사위는 참사 이후 경찰의 행태도 비판했다. 경찰의 안전대책 미비 등으로 인해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진상규명이나 그에 따른 후속 대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경찰은 전국 사이버수사요원 900명을 대상으로 용산참사 관련 각종 여론조사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또 온라인 게시글에는 하루 5건 이상의 반박 글을 올려 진압작전이 정당하고 불가피한 공권력 행사였음을 알리도록 했다.

경찰은 참사가 일어난 현장을 재현하기도 했다. 진상조사위는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트라우마 등을 겪고 있는 특공대원들과 철거민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망루 농성이 ‘도심 테러’라고 규정하는 여론 형성을 위해 남일당 망루 현장을 재현했다”고 비판했다.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검찰수사본부 관계자와 접촉하는 등 수사에도 영향을 미치려 했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 등을 미행·사찰하는 등 인권침해도 자행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재판정에 선 이들은 철거민뿐이었다. 검찰은 경찰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는 무혐의 처분하고 철거민 등 25명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무더기 기소했다. 이 가운데 김씨를 포함한 8명은 4년~5년4개월 징역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2017년 12월29일 문재인 정부는 25명을 특별사면·복권했다. 지난달 31일에는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당시 검찰 수사가 소극적이고 편파적이었다며 검찰이 “철거민과 유족에게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경찰과 마찬가지로 검찰 역시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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