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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2.04 16:27 수정 : 2015.02.05 11:49

서로 다른 주장의 독자 편지 2통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⑥

저는 3주에 한번씩 신문 지면에 ‘현장칼럼 창’을 쓰고 있습니다.

1월27일치에는 ‘비례대표는 건드리지 말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국회가 연말까지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3 대 1에서 2 대 1로 조정해야 하는데 지역구 의석을 늘리려고 비례대표를 줄여서는 결코 안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비례대표는 민의를 효율적으로 반영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니 오히려 국회의원 정원을 과감히 늘려서라도 비례대표 의석을 유지하거나 늘려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제가 쓴 칼럼을 본 독자가 다음날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평소 저의 칼럼을 좋아하고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번 칼럼은 명백히 틀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자는 현행 비례대표제도는 잘못된 것이므로 즉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절대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독자가 보낸 글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권자가 직접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제도상의 문제점, 현행 비례대표 제도와 의원들의 난맥 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어보고 일반 유권자들이 왜 비례대표를 나쁘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만 읽어보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웠습니다. ‘정치 막전막후’를 통해 여러분과 공유하겠습니다.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는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변은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독자의 실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비례대표제포럼 손정욱 청년위원장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역시 제가 쓴 칼럼에 대한 의견이었지만 앞에서 말한 독자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출현시켜 합의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재분배를 촉진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훨씬 유리한 제도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비례대표제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매우 세련된 글이었습니다. 이 글도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두 편의 글을 읽어보고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여러분께서도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비례대표제를 비판하는 독자의 글>

“지역구민 직접 선택 받지 않는 대표는 ‘절대악’
구조로나 자질로나 어느 그룹도 대표하지 못해”

1월 27일자 현장칼럼(#1)을 보고 몇 자 적어 올립니다.

성 기자님의 고매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선거구 하에서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자질이나 지역구간 표의 비례성, 사표 방지 그리고 과잉대표로 일컬어지는 승자독식의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요. 또 비례대표의 장점으로 직능전문 대표성을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 기자님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역구민의 직접적 이해를 고려한 선택을 받지 않고도 국회에 입성하는 방식이 존치되는 한) 현실의 비례대표는 ‘절대악’이며 반드시 그리고 즉시 없어져야 할 제도이고, 그 빈자리는 가능하다면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근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박기춘 민주통합당 원내수석부대표(맨 왼쪽)가 2012년 8월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 관련 금품수수 의혹에 대한 ‘7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첫째, 현재의 비례대표-전국구 국회의원 선출 제도는 비민주적 제도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홈페이지(#2)에 의하면 “(대의 민주주의를 따르는) 우리 헌법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직접선거의 원칙, 보통선거의 원칙, 평등선거의 원칙, 비밀선거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비례대표 선출 과정은 기본적으로 간접선거이며,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지 않으니 보통선거가 아니고, 심지어 당원들 사이에도 평등선거가 아니며, 당내 선발 과정에서도 압력과 파벌이 판친다고 하니 자유선거가 아닙니다. 법적 실체가 불명한 비대위 혹은 공심위를 거쳐 계파 간의 조정(#3)으로 정해진 대상자들 그들 중에도 일부를 자기들끼리의 명목상 투표를 통해 선발하면 국민은 그저 당별로 마릿수를 할당할 뿐입니다. 불행하게 지켜지는 한 가지 원칙은 비밀선거라는 점입니다. 선출 과정이 매우 불투명한 완벽한 비밀선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통진당 이석기가 선출되어 진보-민주진영과 우리 사회 일반에 끼친 해악을 상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석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석기로 인해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 다수가 겨우 판사 10여명에 간단히 해산당하는 전례가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둘째, 위에 거명한 원칙을 거스르고도 얻어진다고 믿어지는 긍정적 효과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채용하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지역선거에서 1순위자를 뽑고나서 버려지는 사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효과는 지역대표와 정당 선택이 언제나 같다는 말도 안되는 가정 하에서만 성립될 뿐, 지역의원에 대한 사표는 사표로 그대로 버려지고 맙니다. 물론 지역에서 경쟁력 없는 후보를 내어 낙선시킨 군소정당이 부스러기 몇 장을 얻어가는 효과는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상위권 정당에 대부분의 의석을 몰아줄 뿐입니다. 군소정당이 계속해서 비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하는 비례대표를 위해 낙선 전문후보를 공천할 근거를 마련해 줄 뿐이지요.

더하여 직능대표라는 허상이 있는데요. 저는 왜 의사직군은 직능대표가 있어야 하는데, 인구 대부분인 주부나 육군사병은 대표가 없는지, 야쿠르트 아줌마나 식당주인은 없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 헌법 어디에 ‘성별’이 따로이 대표되어야 할 직능이라고 명시하고 있는지요. 국민이 원한다면 국회의원 전원이 장애자가 될 수도, 귀화자가 될 수도, 여자가 될 수도, 의사나 이발사가 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일부 직능을 대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되는 인물을 누군가가 ‘낙점’한 후에, 내가 원치않든 원하든 뽑아야 한다는 것은 강요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비례대표도 정확히 몇명의 국민이 그를 원했는지 말하지 못합니다.)

지난 2012년 조준호 공동대표(왼쪽)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킨텍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진보통합당 중앙위원회에서 ‘강령 개정안 심의·의결의 건’이 처리되는 순간 단상으로 뛰어든 한 당원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공격당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셋째, 현 비례대표들의 의정활동은 기본적으로 작동할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백만번 양보해서 겨우 수십명의 비례대표들이 그 출신 지역, 성별, 직업군을 ‘대표’한다고 해도, 그들이 대리하고 (혹은 대리한다고 믿어지고) 있는 그룹을 대표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잠시 ‘대표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국회에서의 대표성이란, 일방적으로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불이익을 나의 대표를 통해 방지하고, 나아가 나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국회의원에 의한 대표성이란 ‘의원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양심, 그리고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표하는 군집의 의견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비록 안철수가 서울대 출신 의사이자 교수이며 강남에 살았고 외동딸은 유학을 보냈고 수천억의 재산이 있는 사업가라고 하더라도, 국회에서는 자신이 대표하는 서울의 상대적 저소득구역인 노원구민의 생활수준과 필요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표(를 강요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구조적으로 안철수가 다음 투표에 다시 선택을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안철수가 다음 선거에 다시 같은 사람들로부터 다시 선택받을 필요가 없다면, 자신의 양심이나 소신에 반하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 비례대표를 생각해 보지요. 비례대표는 연임되지 않습니다. 비례대표는 어딘가 지역구로 나가야 합니다. 비례대표는 자신이 대표한다고 믿어지는 사람들로부터 투표로 당선되지 않았습니다. 비례대표는 그 설치 목적상, 지역민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이유로, 자신이 대리하는 군집을 대표하기 위해 당선되었으나, 이제 자신의 재선은 지역민들이 결정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한 비례대표가 왜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반해, 본인이 대표한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의정활동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요. 아 그 사람은 여자니까 여자를 위해, 저 사람은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을 위해, 노동계에서 왔으니 노동자를 위해, 귀화인이니 귀화인을 위해 본인의 지역구 할당 가능성(혹은 본인이 출마를 생각하고 있는 지역민의 이익)에 반할수 있는 의정활동을 할까요? 비상식적 환상입니다.

넷째, 실증적으로 비례대표에 뽑힌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다음 두 가지 경우 중의 하나입니다. 정상적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어 뒷담을 넘어온 경우(객관적 자격미달 혹은 듣보잡)와 자신을 뽑아줄 사람을 위해 몸바칠 (아니면 선발과정에서 이미 몸바친) 친위대. 정치부 기자이시니 더 잘 아실 것으로 보고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다만 국회의원의 보수와 특권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모두 당사자가 로또에 당첨된 경우인 것은 확실합니다.

약간 잉여스럽기는 하지만, 이 어줍짢은 글을 쓰기 위해 19대에 당선된 비례대표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그것을 표로 정리했습니다(첨부). 그리고 제 나름으로 선발기준상 성적을 매겨보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의정활동 성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선발 과정이지 그들이 들어와 펼치는 의정 활동의 내용이 아니니까요. (볼것도 없지만) 정성을 보아서라도 한번 살펴봐 주세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 주세요. 우리가 진정 이런 비례대표들의 숫자가 두 세 배 되는 것을 원하는가?

(* 글을 보낸 독자가 19대 여야 비례대표들의 경력을 에이(A)부터 에프(F)까지 매겨 파일로 첨부했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인 것으로 판단해 이 자료는 공유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곧 총리며 장관 청문회가 열릴 테고, 이런저런 의혹에 대하여 국회에서 질문과 추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너희 (야당) 국회의원들이나 먼저 청문회를 하자”고 “(야당)국회의원들은 후보자들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자격 시비에 날을 세우며 후보자를 방어하고 물타기를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은 청문회에 나오는 대상자만도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대의제 하에서의 선출직’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국회의원 개인의 자질이나 자격은 미천하다 하더라도, 그 국회의원은 바로 국민 수만명이 직접 손으로 이름을 거명하여(일본의 경우는 지금도 이름을 직접 쓴다고 하더군요) 나 대신 따지고 물어달라고 임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표절 시비가 있는 국회의원이 표절 시비가 있는 국무위원을 추궁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가, 국민에게 직접 선택받지 못한 상태로, 국민의 세금으로 몇년이나 고용하는 국회의원이란 원칙적으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특히나 우리처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보험이 존재하는 한, 보험사기는 피할수 없습니다. 운전을 하는 한, 사고와 딱지의 위험은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제도를 보완할 수도 있겠지만(#4) 어쨌든지 실체가 모호한 비례대표제를 존치시키는 한 로또를 향한 바보들의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비례대표제를 존치시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그것을 없애서 얻을 이익보다 큰가, 그리고 비례대표제를 유지할 때 얻어지는 불이익이 참을 만한 것인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매우 애석합니다만, 은수미나 진선미가 걸릴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지역구민의 선택을 받은 문대성이나 하태경과 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 지역에서는 그것이 민심이라고 보아야 하니까요. 현실의 우리는 이석기나, 조명철, 임수경이나 양정례 부류가 로또에 당첨되어 비례대표가 되고 나면 그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참고로 저는 19대 비례대표가 이전에 비해 각별히 자질이 모자라다거나 더 악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definition of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바로 미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에 의하면,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성 기자님은 이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지나, 더 빨리 더 많이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백군기랑 박윤옥이 자식들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하더군요. 놀라셨어요? 전 놀라지 않습니다.

계속 좋은 칼럼과 방송 부탁드립니다.

응원합니다.

○○○ 드림

참고

#1. 성한용 칼럼 원문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75370.html

#2. 중앙선관위 선거원칙 http://law.nec.go.kr/lawweb/Controller.do?GENSOL_P_KEY=LAWD&GENSOL_M_KEY=LAWDDTIL101030&CONT_ID=201202140067&CONT_SID=0001

#3. <한겨레> 보도 ‘계파별 안배에 진통 거듭…‘전태일 누이’ 전순옥 1번’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524433.html

#4. <한국일보>, ‘“비례대표 나눠먹기·내리꽂기 공천 관행부터 바꿔라” http://hankookilbo.com/v/e4ccfa24010e4db6ad54445a28089c14


<비례대표제포럼 청년위원장의 글>
 

“단순다수제는 25%가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
연정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 가능성 커져”

올 해가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던 차에 성한용 기자님의 칼럼을 읽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 시민들은 여전히 비례대표를 ‘돈 공천’ 혹은 ‘계파 나눠먹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이 성 기자님의 칼럼만 보면 왜 지금 비례대표제 확대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에 이와 관련한 글을 쓰실 때 참고하셨으면 하는 생각에 부족하나마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비례대표제 확대가 왜 한국 정치 개혁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크게 비례대표제의 정치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로 구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왼쪽)가 주재하는 각료회의 모습.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의 소속 닉 클레그 부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우선 비례대표제가 단순다수제에 비해 민주주의 근본정신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다수제는 지역구 내에서 오직 1등한 후보만 당선되는 제도입니다. 2등 이하의 모든 표는 죽은 표가 됩니다. 한국은 유독 그런 경향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예컨대, 지난 13대 총선(1988년)부터 19대 총선(2012)까지 시민들이 1등 당선자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에게 던진 표, 즉 의석에 반영되지 않고 죽은 표가 무려 7천만 표가 넘습니다. 이는 전체 투표수의 약 51%입니다. 절반을 넘습니다. 절반이 넘는 시민들의 표가 의석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구에서 ‘직접’ 뽑았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실상 지역의 ‘절반 이하’에게만 해당하는 말인 것이죠. 예를 들면, 영남에 사는 민주당 지지자와 호남에 사는 새누리당 지지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시민들의 절반의 지지만 받은 정당들 중에서 또 다시 의석의 절반만 확보하게 되면, ‘여당’이란 이름으로 다음 선거가 있기 전까지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당이 국정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할 뿐입니다. 이른바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경기인 것이죠. 이를 보다 거칠고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전체 투표 중에 50%만 의석으로 전환되고, 다시 그 중에서 50%의 지지만 확보하게 되면, 즉 전체 투표의 25%의 지지만으로 적어도 다음 선거가 있는 4년 동안 국회에서 전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례대표제는 시민들의 투표가 그대로 의석으로 전환되는 선거제도입니다. 거의 모든 표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온전히 의석으로 전환됩니다. 또한 다양한 선호를 갖는 시민들의 투표가 의석으로 전환되면, 당연히 의미 있는 정당들의 숫자도 늘어납니다. 실제로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대부분 3개 이상의 유력 정당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특정한 하나의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결국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서로 연합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합의와 협력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 정당들이 언제라도 서로 정권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정당 간 극심한 대립과 갈등보다는 협의와 협력을 중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런 비례대표제 국가들을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국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단순다수제와 달리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전체 투표의 대부분이 의석으로 전환되고, 그 중에서 적어도 두 개의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전체 투표의 50% 이상의 지지를 확보한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 투표의 25%의 지지만으로 전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단순다수제와 가급적 많은 지지를 바탕으로 정당 간 합의를 중시하는 비례대표제 중에 어떤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선거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비례대표제는 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을 줍니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정치학자들은 선거제도와 경제적 문제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왔습니다. 이 연구들이 경험적,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바는 비례대표제 국가들이 단순다수제 국가들에 비해 더 많은 재분배를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줄여주며,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을 펼칠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합니다. 아이버슨과 소스키스와 같은 학자들은 세제 정책에 대한 중산층의 선호 변화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양당제를 유발하는 단순다수제 하에서 중산층은 주로 우파 정당을 선택합니다. 좌파 정당이 집권하게 될 경우, ‘좌경화’를 통해 자신들의 세금 부담은 크게 증가하고 그 혜택은 오로지 빈곤층에만 집중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당제를 촉진하는 비례대표제 하에서 중산층은 자신들의 선호를 반영하는 중도정당에 투표할 수 있고, 결국 선거 이후에는 상류층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중산층 본인과 빈곤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중산층이 증세에 보다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중도정당과 좌파정당 간의 연립정부 구성이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고 재분배정책도 보다 활발하게 진행된다는 논리입니다.

한편 페르손과 타벨리니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비례대표제와 재분배정책 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이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선거구의 크기입니다. 단순다수제 하에서는 자신의 지역구 내에서 당선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지역 내 특정한 소수 집단의 이익을 중시하는 반면,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선거구가 전국 단위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각 정당은 보다 광범위한 복지 혜택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선거구가 작으면 정당들은 지역 내 특정 집단을 대표하게 되지만, 선거구가 크면 전국 차원의 사회경제적 집단을 대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선거구의 크기가 클수록 정당들은 특정 지역 내의 소수의 이익으로부터 벗어나 국가 차원의 복지를 제공하려는 유인을 갖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복지 혜택이 광범위해질수록 소득재분배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단순다수제에 비해 선거구가 큰 비례대표제가 더 많은 재분배를 촉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입장의 논리는 다소 다르지만 비례대표제가 재분배정책을 촉진한다는 결론만은 동일합니다. 유럽의 성공적인 복지국가들이 예외 없이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이쯤 되면 한국도 비례대표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지난 2004년부터 한국에도 1인2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는데, 왜 국내 정치는 더 극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먹고 사는 문제는 더욱 힘들어져만 갈까요?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과연 한국을 비례대표제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답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 정치에서 한 국가를 비례대표제와 단순다수제 국가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국가들이 비례대표제와 단순다수제를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구분 방식은 선거제도의 비례성입니다. 즉, 시민들이 던진 표가 얼마나 정확하게 의석으로 반영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독일의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와 단순다수제의 비율이 동일하지만 대표적인 비례대표제 국가로 구분하는데, 그 이유는 정당의 전체 의석수가 비례대표제 득표율에 의해 결정되어 높은 비례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례성을 기준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교해보면, 비례대표제와 단순다수제 국가들 간의 명확한 단절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매우 강력한 단순다수제 국가입니다. 36개의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교한 레이파트의 연구에서 한국은 비례성이 가장 낮은 국가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이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비례대표 의석은 그간 일종의 구색 맞추기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례대표가 ‘돈 공천’, ‘계파 공천’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비례대표의 장점이 충분히 반영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히려 비례대표의 의석을 대폭 늘려 한국이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 국가가 된다면, 그래서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언론의 제 1 관심사항이 각 정당의 비례대표 명단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로 집중하게 된다면, 돈이나 계파 이익으로 공천을 주는 악습은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각 정당 지도부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비례대표 명단을 허투루 작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각 정당의 공천과정이 보다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법제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비례대표제냐, 단순다수제냐의 논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즉 선거제도의 구분 이전에 당내 공천과 관련한 논의이니만큼, 이와 관련한 내용은 이 글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떤 선거제도를 채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비례대표를 확대하자고 주장하면 항상 듣는 비판은 현재 비례대표 의원들의 충원과정 및 자질에 대한 것들입니다. 지금 있는 비례대표 자체도 문제가 많은데 더 확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문제들의 근본에는 여전히 한국이 강력한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라는 구조적 제약 하에 있다는 점, 그리고 당내 공천 과정의 불투명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 비례대표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왜 선진 복지국가들은 예외 없이 비례성이 높은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지, 그것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효과는 무엇인지, 공천 과정의 투명성은 어떻게 확보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현재 한국의 기존 기득권 정당들과 정치인들은 비례대표제 확대에 반대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쓰다 보니 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칼럼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손정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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