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김정훈 정책위의장(왼쪽부터)과 인사하고 나서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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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9
16일 대통령-새누리 지도부 회동에서의 ‘훈시’
“국민 중심의 정치”=“시키는 대로만 하라”
“김 대표 노고 많았다”=“유승민 쫓아내느라 애썼다”
당 지도부는 “정부 성공이 우리 성공” 충성 맹세
조폭영화에서 본듯한 기시감…다만 희극 아닌 비극
“국민 중심의 정치를 꼭 이루어서 국민 중심의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모범을 이번에 잘 보여주시기를 다시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박근혜 대통령)
“새누리당의 새 원내지도부 출범을 축하합니다. 또 우리 김무성 대표께서 취임 1주년을 맞으셨는데, 그동안 여러가지 어려운 일도 많았는데 잘 이끄시느라고 1년 동안 노고가 많으셨습니다.”(박근혜 대통령)
“저희 새누리당은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곧 우리의 성공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가 당에서 책임지는 그런 자세로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김무성 대표)
“대통령께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당의 새 지도부들을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김무성 대표)
“당청 간에 찰떡같이 화합해서 오로지 국민을 바라보고 당청 간에 소통과 협력으로 앞으로 많은 일을 하자, 대통령님을 잘 모시고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해 잘하자고 다짐했습니다.”(원유철 원내대표) ‘당정청 하나’, ‘국민 중심의 정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당부는 사실상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훈시일 것입니다. 김무성 대표에게 ‘노고가 많았다’고 한 것은 “유승민 원내대표 쫓아내느라 수고했다”는 칭찬일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곧 우리의 성공’, ‘당청 간 찰떡 화합’ 등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의 다짐은 일종의 충성 맹세일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습니까?
영화 ‘두사부일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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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훈이 그 새끼 말이야, 참 겁대가리 없는 새끼야. 감히 똘마니 주제에 조직을 배신해? 한심한 새끼!” 몸집 산만한 김무성 대표의 조아리는 모습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입니다. 저도 많이 웃으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런데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유승민 원내대표 축출 사건을 지켜보면서 자꾸 <두사부일체> 영화의 몇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16일 청와대 회동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글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현재 새누리당 지도부의 관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한 관계입니다. 겉모습만 봐도, 몸집이 산만한 김무성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조아리는 모습도 이상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실도 이상합니다. 내용을 들여다 보면 더 이상합니다. 상명하복, 동일체, 조직, 배신 등 1차원적 단어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관계를 대부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사불란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왕정’을 많이 닮았습니다. 견제와 균형, 분권, 3권분립 등 근대민주주의 작동 시스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직전 이명박 정부에 비교해 봐도 확실히 퇴보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이상한 집단문화 1차 책임은 대통령…그만 탓할 수 없는 이유 우선 대통령이 ‘박근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집단의 문화는 그 집단 수뇌부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기 때문에 행정부와 청와대 비서실, 집권여당이 모두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최고 권력자의 큰딸이었습니다. 유신체제에서는 퍼스트레이디로 활약했습니다. 상명하복과 일사불란한 조직문화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요?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100% 떠넘길 수 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유승민 원내대표 축출 국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에 맞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50명만 있었어도 결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입니다. 독일인들이 나치즘을 지지한 원인을 분석하고 민주주의에 내재된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혹시 우리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지금 그런 상태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명 소설가 복거일씨가 <중앙일보>에 유승민 의원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유승민 의원 비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이유 가운데 첫번째가 조금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군주적 지도력은 줄곧 논란을 불렀다. 그래도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지 민주공화국을 바꾸거나 훼손하려는 의도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서로 믿어야 협력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믿도록 하는 장치로 진화한 것이 도덕이다. 그런 뜻에서 개인적 차원의 배신이 가장 부도덕하다. ‘만일 내가 조국을 배신하는 것과 친구를 배신하는 것을 골라야 한다면 내가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고를 배짱이 있기를 바란다’는 한 작가의 고백은 우리 가슴 깊이 울린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쓰디쓰게 내뱉는 말이 배은망덕이다.” ‘기존 질서 도전 세력=나쁜 놈’은 조폭영화 문법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지난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현재 새누리당을 지배하는 집단문화로 보면 그는 ‘큰형님’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놈’으로 찍혀 제압된 셈이다. 이제 새누리당은 조폭 영화의 마무리처럼 빠르게 ‘질서’를 되찾아가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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