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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에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 사진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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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1
새정치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 그 뿌리는…
정가의 관심은 여전히 분열, 그것도 야권의 분열 가능성입니다. ‘호남 신당’은 과연 출현하는 것일까요?
이른바 ‘친노’와 ‘비주류’의 갈등은 여전합니다. 당직 인사 이후 좀 수그러들었지만 혁신위원회에서 공천 혁신안을 발표하면 다시 터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호남에서는 정치인들에게 탈당 압력이 공공연히 가해지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표에 대한 호남의 거부감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엄연한 정치적 현실인 것 같습니다.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야당은 본래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권력 쟁취를 위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는 여당은 대체로 조용합니다. 힘이 곧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당은 시끄럽습니다. 가난한 집 형제들이 조촐한 밥상 앞에서 다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야당의 갈등은 좀 특이한 현상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을 만든 이후 지금까지 기나긴 야당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 경험을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새정치연합의 뿌리는 DJ가 만든 평화민주당
저는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민당 돌풍이 분 1985년 2·12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처음 정치의 역동성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은 박정희 유신정권과 신군부 세력이 지배한 정치적 암흑기였습니다.
1985년 5월 기자가 된 뒤, 1987년 6월항쟁, 1987년 대통령 선거,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현장에서 사회부 말단 기자로 취재했습니다. 당시 제가 알고 있는 야당의 두 축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씨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 이후 야당의 중심축은 김대중 한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따라서 현재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적 출발은 1987년 김대중씨가 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평화민주당이라고 저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고참 당원과 대의원 중에는 실제로 평화민주당부터 정당 활동을 한 분들이 꽤 있습니다.
평화민주당은 처음부터 두 가지 정체성이 결합된 정당이었습니다. ‘호남’이라는 지역 정체성과 ‘재야’라는 정책 노선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디제이 본인이 바로 호남과 재야의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DJ가 이끌 때는 호남과 재야 서로 다툰 적 없어
디제이의 호남 정체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디제이는 70년대와 80년대에 ‘재야 인사’였고 ‘민주 투사’였습니다. 그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그를 제도 정치권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정권 시절 디제이의 신분은 정치인이 아니라 ‘재야 인사’였습니다. 그는 다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구국선언문을 만드는 등 민주화운동을 이어갔고 그 대가로 감옥생활을 하거나 자택에 연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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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장(가운데)과 혁신위원들이 2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5차 혁신안을 발표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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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거슬러 올라갈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0년대에 국회의원을 할 때 나이가 40대였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디제이가 양복 상의에 손수건 장식을 하고 하얀색 ‘백구두’로 멋을 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시가도 꽤 즐겼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멋쟁이 젊은이였다는 얘깁니다.
19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을 때 유진산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말을 했습니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난다는 뜻이지요. 야당 노정객들의 눈에는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싸가지 없는 놈들’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디제이 스스로가 ‘호남’이자 ‘재야’였기 때문일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을 이끌던 시절 당내에서 호남과 재야가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를 김대중 전 대통령 혼자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디제이는 평민당 창당 이후 재야 출신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했습니다. 재야 인사들은 사실 본래부터 디제이의 동지들이기도 했습니다.
1988년 2월 재야 인사들 중에서 문동환 박영숙 임채정 이해찬 등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만들어 평민당에 입당했습니다. 이후에도 1991년 신민주연합당(신민련)의 이우정 신계륜, 1991년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의 이부영 유인태 제정구, 1995년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김근태 등이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야당에 차례차례 결합했습니다.
이처럼 재야 인사들의 집단적이고 순차적인 가세가 없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당을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고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와 노무현 집권의 영광
외부 인사 영입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뤄졌습니다. ‘재야’가 ‘운동권’으로 명칭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에 만든 새천년민주당에는 송영길 오영식 임종석 등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상태에서 치러진 200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대거 열린우리당에 가세한 것입니다.
현재 제1야당의 역사를 지리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재야와 운동권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세력이 호남과 함께 ‘처음부터’ 야당의 중심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재야와 운동권을 합쳐서 그냥 재야라고 부르겠습니다. 호남은 당의 기반이었고 재야는 당의 영혼이었습니다. 사람의 육체로 치면 호남은 팔과 다리였고, 재야는 눈과 귀였습니다. 호남과 재야는 1997년 손을 잡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습니다. 2002년에도 다시 노무현 집권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난닝구-빽바지’ 논쟁부터 갈라지기 시작
그랬던 호남과 재야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벌어진 ‘난닝구-빽바지’ 논쟁부터였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재집권 이후 집권 여당의 주도권을 누가 차지하느냐였습니다. 디제이가 물러나고 리더십에 공백이 생기면서 본래 한몸이었던 호남과 재야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2004년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당이 깨졌고,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열한 상태에서 치렀습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하나의 정당으로 합쳤지만 분열의 상처는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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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4일 옛 민주당 당무회의장에서 한 당직자가 러닝셔츠 차림으로 ‘민주당 사수’를 외치고 있다. 이때부터 한동안 ‘난닝구’는 실용파의 대명사가 됐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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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 혁신과 통합의 두마리 토끼 잡을 수 있을까
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해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갈등은 이처럼 과거 분열의 상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생각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류는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해보려는 생각이 강하고, 비주류는 ‘문재인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실적으로는 2016년 국회의원 선거 공천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쉽게 봉합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새정치민주연합은 지금 혁신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표, 김상곤 혁신위원장, 박지원 의원, 김한길 의원, 안철수 의원 등 당 리더들의 어깨에 무거운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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