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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6 15:54 수정 : 2015.08.27 16:29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제43회 국제기능올림픽 선수단과의 오찬장에 들어서며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성한용의 정치막전막후 35/‘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두번째 기회

‘8·25 남북 합의’ 최대 수혜자는 북한이 아니라 박 대통령
남북 대화 진정성 견지하면 정상회담 성사시킬 수 있을 것

남북관계는 예측이 어렵습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변 강대국의 이해도 날카롭게 충돌합니다. 이런저런 온갖 변수를 다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2+2 고위 당국자 접촉’이 진행되는 동안 당장 합의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예측한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남북은 밤을 새는 마라톤 협상 끝에 극적인 합의를 이뤘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번 합의에서 군사적 합의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화와 교류의 틀을 마련한 1항(당국 회담)과 5항(이산가족 상봉), 6항(민간 교류)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 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며 앞으로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1항)

“남과 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앞으로 계속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 접촉을 9월 초에 가지기로 하였다.”(5항)

“남과 북은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하였다.”(6항)

합의대로 대화와 교류가 이어지면 자연히 남북 사이에는 신뢰가 쌓일 것입니다. 신뢰가 쌓이면 그 신뢰를 바탕으로 또다시 남북간 경제협력, 금강산 관광 재개, 5·24 조처 해제 등의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회담 성과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기자가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김관진 실장은 약간 머뭇거리며 “그 분야는 지금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아마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정상회담은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남한과 북한은 이미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한 바 있습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의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안열리는 것보다 열리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작동 못한 건 MB 정부 남북관계 파탄 탓

남북정상회담은 단순한 회담이 아닙니다. 남과 북의 최고 권력자가 만나서 대화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강력한 메시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면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파탄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매번 북한과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 선거 공약에는 남북정상회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 내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

<새누리당의 진단>

■ 남북한 간 일체의 공식 대화 채널 단절 및 교류·협력 중단

■ 기존합의 불이행으로 인한 남북간 불신 심화

■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 및 호혜적 협력 사업 재개에 대한 요구 증대

<새누리당의 약속>

■ 정치·군사적 신뢰구축과 사회·경제적 교류협력의 상호보완적 발전

■ 기존 합의에 담긴 평화와 상호존중의 정신 실천

■ 다양한 대화채널 상시 개설 및 정상회담 개최

■ 정치적 상황과 구분하여 인도적 문제 지속적으로 해결

- 북한 주민의 인간다운 삶 위한 대북지원 투명성 있게 추진

- 이산가족 문제의 실질적 성과 도출

- 국군포로와 납북자 귀환 사업 역점 추진

<새누리당의 실천>

■ 신뢰와 비핵화 진전에 따라 한반도 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한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 추진

- 인프라 확충 : 북한의 자생력 제고 위한 전력·교통·통신 등

- 국제투자 유치 : 국제금융기구 가입 지원, 경제특구 진출 모색

- 3각 협력 강화 : 남북중, 남북러 협력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공동 이익 창출

■ 남북한 간 호혜적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 교류 업그레이드

- 보건·의료 협력과 녹색경제(농업, 조림, 기후변화) 협력 체계화

- 개성공단의 국제화와 지하자원 공동개발 추진

-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학술·종교 등 다방면의 교류 내실화

- 남북한 젊은 세대 교류 적극 장려

■ 서울과 평양에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어떻습니까?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지금까지 작동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이명박 정부에서 조성된 남북 간 냉기류를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양쪽에 모두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2011년 12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권력을 승계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느라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은 2013년 3월 남북불가침합의 폐기와 판문점 연락 채널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4월에는 개성공단 근로자를 철수시켰다가 9월에 재가동했습니다.

2014년 1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말뿐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월 “통일은 대박”이라고 기자회견을 했고, 3월에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평화통일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발표했습니다. 2014년 10월에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북한의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세 사람이 남한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얼어붙은 한반도를 녹여낼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번 지뢰 폭발과 비무장지대 포격 사태가 터졌습니다. 다행히 위기는 기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한지 이제 4년이 지났습니다. 김정은 체제가 안정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정은 위원장도 지금쯤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북, 고사포 쏜 뒤 추가로 세발 더 쏜 속내는

여러분은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이 어떻게 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화를 제의한 것이 어느 쪽이었지요? 북한입니다. 대화 제의 바로 전날 북한은 처음에 비무장지대에 고사포를 한발 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좀 큰 포로 세 발을 발사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혹시 고사포 발사를 남쪽이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추가로 포를 쏜 것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북한의 포 사격은 대화 테이블을 마련하기 위해 정밀하게 계산된 ‘의도적 도발’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어쨌든 북한의 요구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열렸고 북한은 ‘유감’이라는 표현과 ‘비정상적인 사태’라는 표현으로 남쪽의 사과 및 재발 방지 요구를 다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은 대북방송 중단과 남북대화 재개라는 실리를 챙겼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북한일까요? 저는 북한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관진 실장이 남과 북의 합의 사항을 공동보도문으로 발표한 25일은 절묘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지 2년6개월이 지난 임기 반환점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지금까지 2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가혹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후반에도 업적을 쌓기가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경제민주화는 실종됐고 창조경제는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경제협력이 이뤄진다면 꽉 막힌 경제가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남북의 협력 강화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 우리의 발언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북관계 개선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외관계와 국내경제에서 동시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절묘한 카드라는 뜻입니다.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의원이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만찬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결국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북한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기 후반기에 업적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것도 임기 반환점에 딱 맞춰서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취임 직후에 이어 두번째 기회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입니다. 남북간 합의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민경욱 대변인을 통해 이런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지뢰 도발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 각종 도발로 끊임없이 우리 국민들의 안위가 위협받아 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끌고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에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북한이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 중단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흔들림 없이 원칙을 고수하면서 회담에 임했습니다.”

“이번 합의는 우리 정부가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한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정무특보를 맡고 있는 윤상현 의원은 이런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과 뚝심이 국민적 지지와 더불어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특히 ‘대통령의 결단이 어떻게 국민과 군을 단결시키는지’가 이전의 사례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나타났다.”

그런가요?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원칙을 지켰지요? 지뢰 사건 직후 우왕좌왕하느라 거의 모든 언론의 비판을 받았던 사실을 그 사이 잊었나요? 이른바 ‘지뢰 도발’을 당하고, 일시적이지만 전쟁 분위기가 조성됐던 것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박근혜 대통령과 윤상현 특보의 ‘자화자찬’에서는 대외관계 성과를 어떻게든 대통령 지지율 상승으로 연결시켜 보려는 얕은 정치적 속셈이 엿보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앞으로 이어질 남북 대화를 제대로 이끌어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어쨌든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성공시키고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내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2000년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4대국 평화 보장론, 3단계 통일론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통일 방안을 내놓았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뒤 빨갱이로 몰리면서도 평화통일론과 햇볕정책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2000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 도쿄방송과 회견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습니다.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췄다고 보인다.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김 국방위원장과의 대화 밖에 없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세심한 배려가 필요

이 발언을 당시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 이상 비난·비방만 해서는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현대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도울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베를린 선언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선언의 요지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큰 감동도 필요하지만 세심한 배려도 필요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여러 단계를 거쳐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2000년과 한반도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가지고 있는 남북대화 의지와 진정성만 잘 견지한다면 임기 후반에 얼마든지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조금만 더 세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은 ‘쳐부숴야할 원수’가 아닙니다. ‘뿌리째 들어내야 할 암덩어리’도 아닙니다. 통일을 향해 손잡고 함께 가야 하는 형제입니다. 잘 달래야 합니다. 역지사지의 지혜도 필요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히 대응한다는 원칙을 지켰고 사실상 북한의 사과를 받아내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겠다고 한 대선 공약을 이제는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남은 임기 동안 남북관계뿐 아니라 경제에서도 결실을 거둘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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