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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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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 39. 국가주의 유전자
박근혜 대통령 ‘청년 일자리 펀드’ 조성 지시하자
황교안 국무총리 “민간 참여 확대 이끌어 나갈 것”
우리는 펀드중흥의 정권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나?
청년 일자리 펀드를 조성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15일 국무회의 발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려운 대타협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저를 비롯한 국무위원 여러분들과 사회 지도층, 그리고 각계 여러분이 앞장서서 서로 나누면서 청년 고용을 위해 노력했으면 합니다. 청년 고용을 위한 재원 마련에 저부터 단초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 국무위원 여러분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셔서 서로 고통을 나누고 분담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안종범 경제수석비서관이 “대통령께서 오늘 국무회의 도중 노사정 대타협 관련 청년 일자리 펀드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밝혔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가 돈 때문이었던가? 이 시대 최대의 과제를 그런 즉흥 이벤트로 접근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펀드 조성이 시작되면 남은 수순은 ‘안봐도 비디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돈을 낸다는데 청와대 비서관들, 여당 의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사실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공기업체 임원들이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대기업 사주와 임직원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청년 일자리 펀드에 돈을 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은 옳지도 않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유신시대가 아닙니다. 대통령과 정부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은 불가능합니다.
<동아일보> 신연수 논설위원이 기동력을 발휘해 16일 아침 신문 ‘횡설수설’란에 ‘박 대통령의 청년일자리펀드’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취지는 훌륭하지만 청년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지금 돈이 없어서 기업이 고용을 못하거나 청년들이 창업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저금리로 인해 시중에는 돈이 넘쳐난다. 아이디어와 시장만 있으면 거의 0%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이 710조 원으로 사상 최대인 데다 현금성 자산도 170조 원이나 된다. 미래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와 고용을 안 하는데 돈을 지원해 준다고 필요 없는 인력을 고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청년일자리펀드는 1970년대식 관제동원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한 기업 임원은 ‘정부가 펀드를 조성하면 기업은 안 낼 수가 없는데 준(準)조세만 늘어난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앞장선 모금운동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이나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금 모으기 운동도 민간이 주창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통일부가 남북통일 자금을 미리 마련하자는 ‘통일항아리’ 운동을 펴고 대통령이 먼저 금일봉을 냈으나 결국 흐지부지됐다.”
“‘청와대가 이벤트 좀 그만하라’는 소리도 기업에서 나온다. 일자리는 기업 활동이 잘 돌아가면 따라오는 것인데 정부는 성장 동력을 고민하지 않고 창조경제혁신센터니 청년일자리펀드니 이벤트만 한다는 불만이다. 정부는 지난해 청년들의 해외 취업을 돕는 사업 19가지에 448억 원을 들였으나 취업한 청년은 1100명에 불과했다. 차라리 1인당 4000만 원씩 나눠주는 게 나았다는 평가다. 세금으로 하는 재정사업도 효과 없이 헛돈만 쓰면서 정부가 펀드를 만들어 제대로 운용할지 걱정이 앞선다.”
어떻습니까? 한 마디도 버릴 대목이 없습니다. 저는 좀더 많은 언론과 기자들이 신연수 논설위원처럼 청년 일자리 펀드를 비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혹시 박근혜 대통령을 말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다음날 국무총리실은 이런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내용이 워낙 기가 막혀서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저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청년희망펀드’ 조성하여 청년 일자리 해결한다!
- 9.16(수),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 ‘국무위원 간담회’ 개최, ‘청년희망펀드’ 조성 방안 확정
□ 정부는 노사정 대타협을 계기로 청년들의 일자리 해결에 도움을 주고자 (가칭)「청년희망펀드」를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 청년일자리 문제해결 지원을 위한 펀드 조성은 9.15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제안했고 금일 황 총리 주재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추진방안을 논의·확정하였다.
□ 정부는 금일 16시에 국무조정실장 주재 관계차관회의를 개최하여 펀드 조성 및 활용, 재단 설립 등에 대한 세부 추진계획을 논의할 예정이다.
* 참석대상부처 : 기재부, 법무부, 미래부, 행자부, 문체부, 산업부, 고용부, 금융위, 인사처
※ 붙임 : 청년 일자리 펀드 조성 관련 국무총리 발표문
<국무총리 발표문>
어제 국무회의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계기로 청년들의 일자리 해결에 도움을 주고자 노블리스 오블리제 차원에서 대통령께서 직접 제안하신 청년일자리 관련 펀드의 조성과 활용 방안에 대해, 오늘 국무위원 간담회를 통해 논의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펀드의 명칭은 가칭 ‘청년희망펀드’입니다. 가칭 청년희망펀드는 사회적 대타협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개혁의 성과를 가시화하기 위해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그리고 공공기관장부터 우선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지도층, 공직사회, 민간에서도 자발적으로 참여가 확대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청년희망펀드는 월급이나 소득에 대한 일정비율 또는 일정금액의 기부를 통해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일시금으로 2천만원을, 그후, 매달 월급에서 20%를 기부하기로 하셨습니다. 또한, 여당에서도 지도부를 중심으로 벌써부터 동참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들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펀드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가칭 ‘청년희망재단’을 신설하고, 연말까지 재단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 시행을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향후 조성된 펀드는 청년구직자에 대한 지원, 창조경제혁신센터와 연계한 민간 일자리 창출 지원 등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구직자와 아르바이트 등의 비정규직 청년들을 대상으로 취업 기회도 최대한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끝으로, 노사 모두 어려운 결단을 내려주신 만큼 정부도 청년희망펀드를 통해 청년들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론의 반응이 궁금했습니다. 17일 아침 몇몇 신문 사설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부 강제한 청년희망펀드로 청년고용 해소될까’(경향신문)
‘청년희망펀드 실업 고통 더는 마중물로’(서울신문)
‘청년 일자리 대책 관제펀드 아닌 투자활성화가 정답’(조선일보)
‘전시성 펀드 아닌 정공법으로 풀어야 할 청년고용’(한겨레)
‘청년희망펀드 자발적 참여·체계적 관리가 중요’(매일경제)
‘박 대통령의 청년펀드 기부 의도는 아름답지만…’(한국경제)
제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친여나 보수 성향의 언론도 걱정스럽다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혜 정부는 왜 이러는걸까요? 본래 생각이 그런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지지율이 치솟자 방심한 탓일까요. 대통령이 앞장서서 돈을 걷겠다는 발상이 정말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가치관과 사고 방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김계원 비서실장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무의식중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삼팔선은 안전한가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북한이 무력 침공을 감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저는 10대 초반부터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딸로 살다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노인들을 대상으로 충과 효를 강의하고 다녔던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더 지난 2015년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사고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국가개조’를 강조한 것이나,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을 애국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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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7일 오후 대구 서구 서문시장을 찾아 신발을 사 신어본 뒤 활짝 웃고 있다. 대구/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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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주의는 국민을 동원이나 계도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가주의 가치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국가주의 가치관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려 애썼습니다.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그랬고, 또 자신의 통치와 독재권력 유지에 국가주의 가치관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12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을 겪은 뒤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간첩을 식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주민등록번호는 지금과 달리 12자리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10101-100001번으로 1호 발급자, 대통령 부인은 110101-200002로 2호 발급자였습니다.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주민등록번호 1번과 2번을 발급받았다는 얘깁니다.
1968년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그 긴 글을 강제로 다 외워야 했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선생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 첫줄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왜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종교를 갖고 있는 분들은 사람의 출생에 대해 목적론적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출생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는 제가 왜 태어났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이왕 태어났으니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름끼치는 말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새마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주도한 농촌 근대화 캠페인인데 정신 개조 수준까지 나아갔습니다. 근면, 자조, 자립이 새마을운동의 3대 정신이었습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젊은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위해 혈서로 쓴 글입니다. 만주신문에 보도됐습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은 철저히 희생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인권을 중시하는 지금의 보편적 가치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옛날 일을 끄집어들여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억지로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197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의 부정적 유산으로 우리 사회에는 국가주의 가치관이 꽤 남아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국민들에게 그런 국가주의 가치관을 더욱 강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2015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친의 그런 국가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국민을 동원의 대상이나 계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국민들은 대통령보다 똑똑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년희망펀드에서 실적을 내려고 몰아붙일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창조경제혁신센터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내면서도 대통령과 정부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치와 국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환멸감을 더 키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옆에 “이건 아닙니다”라거나,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애국자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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