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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3일 저녁 국회 사회·교육·문화 분야 대정부 질문이 이뤄진 본회의장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저녁 식사를 위해 정회를 요구하며 정세균 의장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답변하는 국무위원들이 ‘장관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라는 초유의 ‘시간끌기 전략’으로 길게 말하기도 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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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98
국회의장 영욕사
4·13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꺾은 정세균 의원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호남을 국민의당에 통째로 빼앗긴 더불어민주당에서 전북 출신 6선 의원은 ‘귀하신 몸’이었다. 어떤 자리든 고를 수 있었다. 선택지는 대선주자, 당 대표, 국회의장 세 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선주자나 당 대표를 예상했지만 그는 국회의장을 선택했다.
정세균 의장은 성품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가 대선주자를 포기한 것은 문재인이라는 절대 강자의 존재를 고려한 합리적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전임자들처럼 국회의장으로 정치를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국회의장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뒤 국민들의 평가를 받아보고 국회의장 이후를 생각해보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개헌이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등에 몰두하는 이유다.
그러나 정세균 의장의 상황 판단에는 한 가지 치명적 허점이 있었다. 새누리당 지도부를 ‘친박 돌격대’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홀히 한 것이다.
정세균 의장은 9월1일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사드 배치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비판했다. 국회의장이 그 정도 정치적 발언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소리나 지르다 그만둘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의원들은 의사일정 거부라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도 마찬가지였다. 정세균 의장에게 잘못이 있다면 마이크가 켜 있는 줄 모르고 속내를 드러내는 발언을 한 것뿐이다.
역대 입법부 수장 다양한 평가
날치기 거부 이만섭 의장 족적 뚜렷
문민정부 이후 의회주의자로 채워져
대통령 견제하고 대화와 타협 추구
사상 두번째 야당 출신 정세균 의장
새누리당 강경 지도부가 궁지로 몰아
새누리당 지도부가 정세균 의장을 궁지로 몬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정세균 의장이 정국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일 뿐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2일 단식을 중단하며 정세균 의장의 출국을 ‘허가’했다. 정세균 의장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리는 ‘믹타(MIKTA·5개 중견국 협의체) 국회의장 회의’ 참석을 위해 3일 오후 쓸쓸히 출국했다.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국가원수를 겸하기 때문에 의전 서열은 대통령에 이어 2위다. 자리는 높지만 권력은 없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회의장은 대통령의 부하나 다름없었다. 국회의장이 존재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상대적으로 대통령 권력이 약화되면서부터다.
국회법 10조(의장의 직무)는 “의장은 국회를 대표하고 의사를 정리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무를 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를 대표하는 사람인 만큼 다수당의 다수파가 맡는 경우가 많다. 정세균 의장도 그렇다. 역대 국회의장의 정치적 위상은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에 따라 달랐다. 여대야소에서는 낮았고 여소야대에서는 높았다.
국회의장 당적 보유 금지는 2002년 3월 이만섭 국회의장 시절 이루어졌다. 당시 법률안 제안 이유는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보장하고 국회의 위상 제고를 위하여 의장이 당적을 보유할 수 없도록”이라고 되어 있다. 당적 보유 금지는 대통령의 압력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야당 출신 국회의장들이 출현하면서 이제는 ‘정파적 중립성’을 요구받고 있다.
김영삼 정부 이후 국회의장은 대개 의회주의자들이었다. 국회의 위상과 역할을 끌어올려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고 여야간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대통령과 갈등을 빚거나 신경전을 벌였다.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은 역시 이만섭 의장이다. 그는 1993년 4월 김영삼 정부의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으로 물러난 박준규 국회의장의 뒤를 이어 의장에 올랐다. 그는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그 당시까지 집권 여당 민자당은 국회에서 상습적으로 날치기(강행 처리)를 했다. 이만섭 의장은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만섭 의장에게 “법정기한 내에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주문했다. 날치기 요구였다. 이만섭 의장은 거절했다. 사회권을 황낙주 국회부의장에게 넘기고 이를 야당에 통보했다. 황낙주 부의장은 본회의장에서 날치기를 시도하려다 야당 의원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사상 초유의 날치기 실패 사건이었다. 예산안은 여야의 추가 협상을 거쳐 닷새 뒤 국회를 통과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만섭 의장 연임 보장 약속을 파기했다.
이만섭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인 2000년 6월 다시 한번 국회의장을 맡았다. 대통령에 의해 내정되지 않고 여당 의원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결정된 첫 사례였다. 국회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20명에서 10명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이 정국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자민련을 위한 입법이었다. 여당은 날치기를 요구했지만 이만섭 의장은 거부했다. 이번에는 사회권도 넘기지 않았다. ‘법대로 표결해 달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부도 “야당이 결사적으로 막고 있으니 타협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의원 꿔주기’로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이만섭 의장의 뒤를 이어 상도동계인 황낙주·김수한 의원이 차례로 국회의장을 맡았다. 김수한 의장은 1996년 12월26일 새벽 노동법 날치기 때 오세응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겼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날치기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8년 자민련의 박준규 의원이 국회의장을 다시 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박준규 의장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의 상습적 날치기 때 국회의장을 했던 구시대 인물이었다. 그의 국회의장 복귀는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 공동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2년 박관용 국회의장은 헌정 사상 최초로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 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야당 출신 국회의장은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의 대립을 상징한다. 박관용 의장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 그는 다음해 <다시 탄핵이 와도 나는 의사봉을 잡겠다>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리고 12년 뒤 다시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 등장했다. 정세균 의장도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의 대립을 상징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스승인 김원기, 재야 및 평민당 출신 임채정 의원이 차례로 국회의장을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김원기·임채정 의장에게 여러 차례 날치기(강행 처리)를 요구했지만 두 사람은 여당의 요구를 좀처럼 들어주지 않았다. 김원기 의장은 2005년 12월9일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해 표결로 처리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폭력적 날치기로 처리된 사학법 개정안은 원천 무효”라며 장외투쟁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회의장이 된 김형오 의장은 날치기 때문에 상당한 수모를 겪었다. 김형오 의장은 2009년 7월22일 미디어법 처리에 나섰지만 야당과 언론계 인사들에게 가로막혀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하자 사회권을 이윤성 국회부의장에게 넘겨 날치기를 완성시켰다. 김형오 의장은 9월1일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하다가 야당 의원들이 “날치기 주범 사퇴하라”며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하는 바람에 스타일을 구겼다. 김형오 의장은 그해 12월31일에도 이른바 4대강 예산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해 통과시켰다. 그는 국회의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국회의원 스스로의 권리와 의무를 저버리는 후진적 국회를 개선하려면 직권상정을 과감히 없애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2010년 12월8일 2011년도 예산안 날치기를 총괄 지휘했지만 정작 마지막 의사봉은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두드리도록 했다. 국회 본회의장 유리가 깨졌고 국회의원들 사이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야당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박희태 의장은 날치기에 대해 몇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2011년 11월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도 마찬가지 수순을 밟아서 정의화 부의장이 처리하도록 했다.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2012년 개원한 19대 국회에서는 날치기가 사라졌다. 국회선진화법이 발효됐기 때문이다. 강창희·정의화 의장은 과거에 비하면 매우 순탄하게 의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 비박 출신이었던 정의화 의장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막무가내로 법안 처리를 요구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의 압력을 거부했다. 2015년 6월 국회의 행정입법 통제를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행정부가 반대 의사를 밝히자 ‘정의화 중재안’을 마련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끝내 거부권을 행사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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