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 현충탑에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141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 첫 대통령 탄생
2011년 인터뷰에서는 “저는 도저히 엄두 못낼 일”
2012년 첫 도전, 2017년 재수해 19대 대통령 당선
노무현도 문재인도 예상못한 ‘문재인 대통령’
다하지 못한 친구의 숙제 끝내야 하는 ‘운명’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 현충탑에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
대한민국 정치사는 참 흥미롭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됩니다. 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됩니다. 문재인 19대 대통령은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그리고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는 15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이해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알아야 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4년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14대 국회 진출에 실패하고 민주당 최고위원을 하며 재기를 모색하던 시기입니다. 진솔한 고백과 투박한 문체로 화제가 됐던 책입니다. 이 책에 ‘문재인’이라는 이름은 별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면서 사건 유치 커미션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문재인 변호사’가 나옵니다.
“그러다가 82년 연수원을 졸업한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커미션을 일체 끊어버렸다. 새로 시작하는 후배 앞에서 차마 추한 꼴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0일 오전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을 나서며 후보 때 경호를 했던 경찰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1980년대 중반 운동에 뛰어드는 대목에서 문재인 변호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 시절 변호사 사무실을 함께 운영했던 문재인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발령을 받지 못했다. 대학 시절의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82년 나와 같이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 85년 운동을 본격적으로 할 때도 항상 나와 호흡을 함께 맞추어 왔다. 지금도 문 변호사는 부산의 각종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에 몇 차례 육성 인터뷰를 남겼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하던 시기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009년 9월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공개됐습니다. 인터뷰 당시 비서실장이었기 때문인지 이 책에도 ‘문재인’이라는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후보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4월20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중앙로에서 유세를 하기에 앞서 시민들 사이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원주/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세 분 다 훌륭한 재목입니다. 그 사람들의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저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바람을 잘 일으키는 정치인이 꼭 바람직한 정치인인지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히려 말을 떠듬떠듬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적을 봐서 신뢰할 수 있으면 좋은 지도자가 아니겠습니까?”
‘정치인의 길’에 대해서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정치가 뭐 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시기에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치인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그 사람이 그 시기의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역사적 과제를 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가 경제를 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스템이 돌아가는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경제가 죽었다 살았다 하지는 않습니다.(중략)
빌리 브란트가 왜 높이 평가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독일의 역사적 과제였고 세계 인류에게 부과된 중대한 역사적 과제인 동방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인과 정치에 대해 말한 이 대목을 읽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몰랐겠지만 결과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바로 그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 ‘역사적 과제를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노무현 서거 1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에서 엮고 유시민 전 장관이 정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2010년 4월26일)가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남긴 자필기록과 구술기록을 토대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문재인’에 대한 얘기가 조금 더 자세히 나옵니다.
“문재인 변호사와 손을 잡았다. 원래 모르는 사이였지만 1982년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서도 판사 임용이 되지 않았다. 정직하고 유능하며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 당시 세속적 기준으로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사건도 많았고 승소율도 높았으며 돈도 꽤 잘 벌었다. 법조계의 나쁜 관행과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 정리하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인권변호사로서 독재정권에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면 나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
담배를 피우며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
|
1980년대 중반 인권변호사로 노동 사건을 맡으며 운동에 전념했던 시기를 회고하면서 문재인 변호사와 문재인 비서실장 얘기가 다시 나옵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가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문재인 변호사는 이 모든 일을 함께했다. 나는 돈 버는 일을 전폐했지만, 그는 사무실 운영을 도맡아 하면서 매월 내게 생활비를 주었다. 부산에서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있는 힘을 다했고,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아 주었다.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서 대통령 임기 내내 나를 도와주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리와 퇴임 후 검찰 수사 때도 내 곁에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한 것은 그저 해 본 소리가 아니다. 나이는 나보다 젊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친구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다.
이 말은 문재인 개인에 대한 것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부족했던 나를 민주화 운동으로 이끌어 주고 내가 정치판으로 떠난 뒤에도 굳건하게 부산을 지켰던, 부산지역 시민사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 뜨거웠던 6월의 밤 아스팔트 위에서 독재타도를 함께 외쳤던 부산의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들 모두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여러 번 낙선하면서도 부산을 아주 떠나지 못한 것도 그분들과 함께 이루었던 모든 것, 그분들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나중에 정치를 할 것이라고,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대통령 자리에 오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육성 인터뷰에서 문재인 얘기를 하다가 부산 시민 얘기로 흘러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문재인 대통령을 민정수석으로 발탁한 것도 사실은 그가 ‘정치적 고려’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강직한 부산 변호사였기 때문입니다. 검찰에 몸담은 적이 없어서 검찰과 유착하거나 휘둘릴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민정수석을 맡던 순간을 <문재인의 운명>(2011년)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민정수석실 업무 내용 때문에 법조 출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검찰을 장악할래야 할 수 없는 비검찰 출신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하고자 한 것이 당선인 생각이었다. 더 나아가 나 같은 사람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함으로써, 검찰을 장악할 의사가 없다는 대통령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아무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자신이 나중에 정치를 하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 6월 <문재인의 운명> 책이 출간됐을 때 제가 부산에 출장을 가서 ‘문재인 변호사’를 인터뷰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런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습니다.
|
2011년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6월15일 출간한 책 <문재인의 운명>. 김태형 기자
|
-책의 마지막 문장이 강렬하다. ‘당신(노무현 전 대통령)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 하게 됐다.’라고 했는데, 숙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치적으로 해석하진 말아 달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 진보적 민주주의 풍토나 토대를 넓혀나가는 일을 말한 것이다. 노무현재단을 맡은 것도 그 일환이다.”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 지지도가 꽤 높게 나온다. 이유가 뭘까?
“수면 위의 우리 쪽 후보들이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대세론에 비해서는 크게 부족한 것처럼 보이니까 대안을 찾는 과정인 것 같다. 또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동안 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아서 비교적 착한 역할과 좋은 이미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를 시작하면 금방 밑천이 드러난다.”
-그럼 ‘문재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다음 대선에서 누가 우리 쪽 대표 선수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어떻게 잘 통합과 연대를 해서 후보를 내세우느냐가 더 중요하다. 국민이 정권교체 희망을 갖게 되면 선거에 역동성이 생긴다. 그 통합에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힘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도대체 왜 정치와 선을 긋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잘 못 할 것 같아서 그렇다. 현실 정치에서 요구되는 능력이 선한 의지만이 아닌 것 같다. 선거를 치를 능력, 개인기도 필요하다. 정치에서 원칙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원칙을 지켜가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뚜렷하게 보여줬다. 긴 세월을 통해 낙선으로, 대선자금 수사로, 탄핵으로 보여줬다. 끝내 퇴임 후까지도 고통을 받았다. 그런 원칙을 지켜나가려면 정말로 대단히 강인한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런 걸 굉장히 많이 갖고 계셨다. 개인기도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좌절했던 것 아닌가. 저는 도저히 엄두를 못 낼 일이다.”
|
2007년 5월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문재인 비서실장과 정국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랬던 문재인 변호사가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대통령을 하고 싶어서 평생을 바치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정치를 하지 않으려고 버티던 ‘문재인 변호사’가,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재수 끝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현실이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나는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지만 구시대의 막차가 되고 말았다”고 여러 차례 탄식했습니다. 이제 ‘노무현의 비서실장’ 문재인 대통령은 ‘새 시대의 첫차’라는 노무현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한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나온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2010년)의 머리글을 당시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였던 문재인 변호사가 썼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존경과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마주’입니다.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이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 그가 따라가고 싶어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이 글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읽어도 내용이 워낙 절절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목표가 개인적 출세였던 시절도 있었고 사회의 진보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또한 당당하게 살고자 분투했던 사람입니다.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변호사였던 그는 소위 부림사건을 만나 뒤늦게 역사와 사회에 눈을 뜬 이후 마치 활화산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정치에 뛰어든 뒤 숱한 좌절을 겪고 낙선을 거듭하였지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했지만, 잘못을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고 교정해 가면서 원칙과 상식의 힘에 기대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한결같이, 그는 반칙과 분열주의에 항거했으며 기회주의와 분연히 맞서 싸웠습니다. 힘이 없을 때에도 부당한 특권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쥐었을 때에는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당당한 사람이 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오랜 세월 멀리서 가까이에서 본 ‘인간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기록하거나 구술하였던 삶의 기록 곳곳에서, 우리는 전력을 다해 싸우고 끝없이 번민하는 ‘인간 노무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전 비서실장과 함께 2009년 4월30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