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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26 14:49 수정 : 2017.05.26 14:59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왼쪽)가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144
권노갑·박지원 등 동교동계 주류 대선 패배
민주주의와 한반도평화 디제이 가치 못지켜
권력도 명분도 놓쳐 곤혹…탈당카드 만지작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왼쪽)가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랫동안 우리나라 정치의 양대 종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였습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공화당,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제대로 된 정당이나 정치세력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1970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통해 야당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30년 동안 우리나라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정치인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상도동계나 동교동계에 닿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980년대에 동교동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에 드나들던 비서들이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전 의원, 설훈 의원 등이 동교동 비서 출신 정치인들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7년 창당한 평화민주당과 1995년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한 정치인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을 동교동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큰 정치인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살해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싸웠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돼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손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보여준 선택과 행동 때문입니다. 동교동계는 두 차례에 걸쳐 분열했습니다.

첫 번째 분열은 2012년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한광옥 전 의원은 동교동 비서 출신이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동교동계 인사였습니다. 그는 1982년 5공화국 살벌한 시기에 민한당 의원으로서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가장 먼저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가했고 1988년에는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비서실장을 지냈습니다. 1997년에는 디제이피(김대중-김종필) 후보 단일화 협상대표로 정권교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습니다.

그랬던 한광옥 전 의원이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 대선캠프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는 동서화합이고 동서화합의 적임자는 박근혜 후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까지 맡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김경재 자유총연맹 중앙회장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동교동계였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썼던 사람입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쫓겨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국에서 만나 민주화운동을 했고 1987년 귀국한 뒤에는 평화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랬던 김경재 전 의원이 2012년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 대선캠프에 들어갔습니다. 2015년에는 박근혜 대통령 홍보특보를 했고 2016년부터 자유총연맹 중앙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해 연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태극기 집회를 이끌었습니다.

한화갑 전 의원은 동교동계의 ‘양갑’(권노갑-한화갑)으로 불릴 정도로 동교동계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한화갑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목포·무안에서 14~16대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새천년민주당 대표도 지냈습니다.

그런 한화갑 전 의원도 2012년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한화갑 전 의원은 “박근혜 후보가 호남 사람들을 많이 기용한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지지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 뒤 약속을 어기고 호남 사람들을 기용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공개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들이 선택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이후 구속돼 지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참 궁금합니다. 이처럼 2012년 대선 국면에서 동교동계 몇몇 인사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것에 대해 ‘동교동계 주류’에서는 “정치적 배신”이라거나 “일부 인사들의 일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동교동계 주류’는 한광옥·김경재·한화갑 전 의원에 비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훨씬 더 가까웠던 권노갑 전 의원, 박지원 의원 등을 의미합니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12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 기자회견문을 꺼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그런데 2016년 4·13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교동계의 두 번째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분열은 첫 번째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이뤄졌습니다. 계기는 민주당의 2015년 2·8 전당대회였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절치부심 끝에 복귀를 시도한 문재인 대통령과 호남을 등에 업고 당대표직에 도전한 박지원 의원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입니다.

전당대회 기간 내내 박지원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호남을 차별했다고 공격했습니다. 이 때문에 호남의 민주당 당원들 사이에서는 ‘반문재인’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전당대회가 끝난 뒤에도 문재인 대표는 호남의 거센 저항에 고전했습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하자 동교동계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권노갑 박지원 김옥두 정대철 정균환 이훈평 박양수 김동철 최경환 등 이른바 동교동계 주류가 대거 탈당해 안철수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에 합류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에 남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씨와 설훈 김한정 의원 등이 동교동계 선배들을 강하게 성토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동교동계 주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요? 4·13 총선 결과 국민의당은 호남 지역구를 거의 다 쓸어 담았습니다.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의 선택은 탁월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들의 어깨는 한껏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고 촛불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습니다.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은 열심히 안철수 후보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양강구도를 형성했을 때는 ‘안철수 대통령’ 탄생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안철수 후보가 아니라 문재인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호남에서는 그 격차가 더 두드러졌습니다. 동교동계 주류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승부입니다. 승부는 선거로 가려집니다. 이기면 권력을 잡고 지면 권력을 잃습니다. 승리하면 정당성을 획득하고 패배하면 정당성을 잃습니다. 정치의 본질은 선택입니다. 오래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전자제품 광고 문안이 있었습니다. 정치에 잘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동교동계 주류의 실패는 명분을 크게 잃었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권노갑 박지원 등 동교동계 주류 인사들은 이번 대선을 치르며 “디제이의 진정한 계승자는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라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김대중 정신’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사람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궤변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민주주의와 한반도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민주주의와 한반도평화는 같은 가치의 다른 측면입니다. 분단세력이 민주주의를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평화 없이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재인과 안철수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한반도평화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정책 공약을 이번 대선 기간에 선보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대표직에서 물러난 박지원 의원은 “선거 기간 내내 디제이의 햇볕정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디제이의 햇볕정책을 계승해 한반도평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했던 대선 후보는 안철수 전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동교동계 주류는 국민의당에서 권력도 잡지 못하고 정치적 명분도 상실하는 곤궁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근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 사이에 ‘탈당’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명분은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하는 국민의당 일부 의원들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입니다.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는 사람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 집단 탈당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25일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박주선 의원은 “다른 정당과의 통합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탈당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은 앞으로 다른 명분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바른정당과의 합당 반대는 명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야당이 아니라 여당을 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선 국면에서 그렇게도 문재인 후보와 친노패권주의를 비판하던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니 친노패권주의는 사라진 것 같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자들에게 “사실 나는 본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으로 돌아가서 여당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봅니다.

정치가 도대체 뭘까요?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고 여당이 돼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정치일까요? 한때 우리나라 정치의 양대 종가 가운데 하나였던 동교동계 사람들, 그중에서도 국민의당에 몸담은 동교동계 사람들의 최근 모습은 정말 참담하고 굴욕적인 것 같습니다. 박지원 의원이 최근 이런 글을 썼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급합니까. 지금은 ‘문재인 시간'이며 ‘문재인 태풍'이 붑니다. 국민 81.6%가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도 박수를 쳐야 합니다. 정치는 명분을 중시하고 내 생각이 아니라 국민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태풍은 강하지만 길지 않습니다. 산들바람은 불어도 봄날은 갑니다. 대통령의 5·18 기념사, 인사 등을 보면 호남에서 국민의당 지지도가 5% 나오는 것도 저는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단결이 필요합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지도부는 자숙하고 비대위를 공동위원장 체제로 하겠다는 발상부터 비상식적입니다. 상선약수! 물이 흘러가는 데로 흐르다 보면 태풍은 가고 봄날도 갑니다. 복구하면 삽니다. 허둥대면 망합니다.”

어쨌든 동교동계로서 다행스러운 일은 권노갑·박지원 등 국민의당으로 간 사람들이 동교동계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불어민주당에 남아 있거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도왔던 동교동계 인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에는 문희상, 설훈, 이석현, 김한정, 이훈 의원 등이 동교동계입니다.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던 4월 19일 배기선 배기운 김태랑 한영애 조재환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문재인 후보 지지 성명이 나왔습니다. 이강래 전 의원, 정동채 전 장관, 박금옥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도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많이 도왔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 김홍걸씨도 문재인 후보 선거운동을 매우 열심히 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을 도운 동교동계 인사들이 당장 무슨 권력을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예로서 민주주의와 한반도평화를 위해 정권교체에 기여했다는 명분을 건졌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이보다 더 소중한 명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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