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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8 14:10 수정 : 2019.04.28 14:42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의원들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손팻말-펼침막-태극기-성조기 뒤섞여 한목소리 외쳐
나경원-황교안 연설 곳곳에 이해할 수 없는 무리한 주장
나경원, 작년 12월 서명했던 연동형비례대표제 공격
좌파독재 주장 황교안, 박정희 유신독재 학생연대장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의원들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광화문 집회에 가 볼 생각을 한 것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집회와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퇴진과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 덕수궁 앞, 광화문 사거리에 매주 줄기차게 모이는 태극기 부대와는 또 무엇이 다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주말인 27일 오후 1시 전철 5호선 광화문역에 내렸습니다. 태극기 집회를 취재할 때처럼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 썼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시비라도 걸까 봐 겁을 낸 것입니다. 공연한 걱정이었습니다. 집회와 행진은 평화로웠습니다.

화창한 날씨 탓이었을까요? 전국에서 모여든 자유한국당 당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시도별로 당원들을 소개할 때는 그 지역과 인연이 있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를테면 대구는 김광석의 ‘일어나’, 충북은 나훈아의 ‘울고 넘는 박달재’, 호남은 김수희의 ‘남행열차’, 제주는 혜은이의 ‘감수광’ 노래가 분위기를 달궜습니다. 서울은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었습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당원들은 자기가 소속한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 이름이 적힌 피켓을 자랑이라도 하듯 높이 들고 다녔습니다. 주최측은 집회 참석자들에게 ‘문재인 STOP 국민심판', '독재타도 헌법수호’라고 쓴 손팻말을 나눠주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집회 참석 인원이 국민과 당원을 포함해 5만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냥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확한 인원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나운서 출신 한선교 사무총장과 배현진 당협위원장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한선교 사무총장은 자유한국당에서 연예인들을 섭외하려고 했지만 방송에서 출연정지를 당할까 봐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꿩 대신 닭’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나경원 원내대표와 황교안 대표의 연설이었습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4선 국회의원답게 빼어난 연설 솜씨를 보였습니다. 청중은 연설 도중 수없이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날 집회 무대는 차로를 따라 길게 세로로 설치됐고 붉은 카펫이 깔렸습니다. 나경원 대표가 그 위를 걷는 모습이 마치 영화배우 같았습니다. 어느 언론에서는 ‘레드 카펫 걷는 나경원’이라는 사진 설명을 붙였더군요.

황교안 대표는 겉옷을 벗고 팔을 걷어붙인 채 오랫동안 연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여전히 어색했습니다. 2·27 전당대회 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목소리만 우렁찰 뿐 메시지가 청중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연설 도중 사회자가 “황교안 황교안” 연호를 외치며 추임새를 넣었지만, 나경원 원내대표에 비해 청중의 호응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무튼 두 사람의 연설을 듣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연설 내용에 터무니없는 대목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납득하기 어려웠던 대목과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략 이런 것입니다.

<나경원 원내대표 연설>

“그들이 망치를 가지고 와서 문을 부수고 빠루로 때려 부수려고 해도 저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 망치와 빠루(노루발못뽑이)는 자유한국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걸어 잠근 회의실 문을 열기 위해 국회 사무처 소속 직원들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회의를 하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회의실 문을 걸어 잠가 놓고 그 문을 열려고 한 국회 사무처 직원들이 마치 부당한 폭력을 사용한 것처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법안 제출을 어떻게 했나요. 국회법상 있을 수 없는 전자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이런 불법 전자 법안등록은 원천 무효가 아니겠습니까?”

=>전자 법안등록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 의안과를 점거했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 등이 처음으로 사용한 방법이지만, 엄연히 합법적인 법안등록 방법입니다. 국회의원의 법안 제출을 자유한국당이 물리적으로 저지한 것이 오히려 불법입니다.

“저희가 국회 회의를 정상적으로 저지했더니 이제 도둑 회의를 했습니다.”

=>국회 회의실에서 열어야 하는 회의를 열지 못하도록 막아 놓고,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연 회의를 도둑 회의로 몰고 있습니다. 일종의 적반하장입니다.

“여러분 연동형 비례대표제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모르겠죠? 심상정 의원도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선거법을 보니까 수학 공식입니다. 내가 찍은 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아몰랑 선거법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해 12월 15일 5당 원내대표 합의문에 서명했습니다. 합의문 첫 번째 항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였습니다.

=>2018년 11월 5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에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를 출범시키고 내놓은 합의문 9항은 “선거연령 18세 인하를 논의하고,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협력한다”였습니다.

“우리가 160석일 때도 우리 세력이 185석일 때도 선거법은 합의해서 통과시켰습니다.”

=>1988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꾼 이후 선거제도의 큰 틀을 바꾼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소선거구제가 1당과 2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국회법 위반이라고 우리 의원 18명을 고발했습니다. 우리는 불법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입니다. 18명이 아니라 114명을 다 고발해도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국회법 165조와 166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165조(국회 회의 방해 금지)

누구든지 국회의 회의(본회의, 위원회 또는 소위원회의 각종 회의를 말하며,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를 포함한다. 이하 이 장에서 같다)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폭력행위 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66조(국회 회의 방해죄)

① 제165조를 위반하여 국회의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이나 그 부근에서 폭행, 체포ㆍ감금, 협박, 주거침입ㆍ퇴거불응, 재물손괴의 폭력행위를 하거나 이러한 행위로 의원의 회의장 출입 또는 공무 집행을 방해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제165조를 위반하여 국회의 회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회의장 또는 그 부근에서 사람을 상해하거나, 폭행으로 상해에 이르게 하거나,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사람을 폭행 또는 재물을 손괴하거나, 공무소에서 사용하는 서류, 그 밖의 물건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상ㆍ은닉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사람은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것은 수학 공식처럼 해서 내가 찍은 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계산대로 하면 민주당과 정의당이 안정적 과반을 확보한다는 것입니다. 좌파연합 세력이 이 선거제로 과반 안정적 의석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개헌 확보선도 확보할 수 있는 그런 선거제도입니다. 좌파독재 세력의 장기집권 플랜의 첫 번째 단추인 것입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금보다 의석이 줄어들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석을 합쳐서 안정적 과반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은 잘못된 것입니다. 개헌에 필요한 200석이 된다는 주장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공수처(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는 한마디로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임명하고 마음대로 하는 독재의 칼입니다. 공포 정치의 시작입니다.”

=>백혜련 의원이 26일 국회에 대표 발의한 공수처법을 보면, 공수처장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 법원행정처장, 대한변호사협회장, 여당 추천 2명, 야당 추천 2명 등 모두 7명으로 구성된 추천위원회에서 5분의 4 이상 의결로 추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마음대로 처장을 임명할 수 없습니다.

=>공수처는 과거 검찰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면서 사정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사정기관을 별도로 설치할 필요에 의해 제안됐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뿐만 아니라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후보도 공약했습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공약한 적이 있습니다.

<황교안 대표 연설>

“자유한국당 의원 18명이 고소 고발을 당했습니다. 자유한국당에는 법률자문위원회가 있습니다. 법률지원단 변호사 30명을 확보했습니다. 제가 ‘30명 갖고 되겠냐. 300명의 변호사를 구하라’고 법률지원단장에게 얘기했습니다. 이 300명이 고소당한 18명 의원을 반드시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국회법에 명시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국회의원들을 법률적으로 어떻게 구해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변호사가 많으면 유죄가 무죄로 바뀌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변호사 300명이라는 말을 들으며 ‘혹시 물리력으로 막으려는 것인가’라고 잠시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애국 시민 여러분 우리가 꿈꾸는 자유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요. 주권재민의 나라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독재국가입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와야 하는데 독재자로부터 나오는 이런 정부가 독재정부 아닙니까.”

=>저는 황교안 대표가 현 정부를 독재라고 비판할 때마다 쓴 웃음이 나옵니다. 독재가 무엇일가요?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정도는 돼야 독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인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며 학도호국단 학생연대장을 했습니다.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체력장에 수류탄 던지기가 있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의 경기고 동문들에 의하면 전교생이 분열이나 열병식을 할 때 황교안 학생연대장의 목청이 하도 좋아서 그의 구령이 경기고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고 합니다.

황교안 대표는 만성 담마진으로 징집면제 판정을 받고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83년 검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독재 시절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 학도호국단 학생연대장을 지내고 검사를 했던 사람이 지금 문재인 정부를 독재라고 비판하는 이런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국민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이런 정부가 독재정권입니다. 국민의 60%가 탈원전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60%가 반대하는데도 정부가 막무가내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재정부라는 것입니다.”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면서 여론에 따르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도를 방문했을 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한-일 관계는 크게 악화했습니다. 그래도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최근 선거법 개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찬성 의견이 반대 의견보다 훨씬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황교안 대표의 논리대로라면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이 독재 정당입니다.

“장자연 사건 아시죠? 오래전에 수사해서 끝났던 것입니다. 버닝썬 사건 아시죠? 다 묻혔던 이 사건들을 대통령이 나서서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수사 지시해도 되는겁니까? 심지어는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까지 다시 조사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민주국가일까요?”

=>장자연 사건이나 버닝썬 사건을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김학의 차관 사건은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자신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문재인 정권은 그냥 독재정권이 아니라 좌파 독재정권입니다. 우파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다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반시장 좌파 이념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 정부를 우리가 반드시 심판해 내야 합니다. 자유를 지키자는 것이 극우라면 이 정부가 하는 것은 극극극극좌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좌파독재 중단하라!”

=>자유한국당 내 친박 세력과 태극기 부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좌파’ ‘우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 중에 얼마나 될까요? 황교안 대표의 철 지난 색깔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태극기 부대를 흡수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공안검사’라는 그의 정체성과 잘 부합하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만든 법안을 이메일로 제출했습니다. 이메일로 법안을 제출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어제 그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게 과연 민주 자유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26일 전자 입법발의는 이메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인편, 팩스, 이메일을 통한 법안 제출이 자유 한국당 의원들의 국회 사무처 의안과 점거로 불가능하게 되자,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는 전자 입법발의를 했습니다. 각 의원실에 부여한 아이디로 인트라넷에 접속하는 방식입니다. 황교안 대표는 ‘이메일’과 ‘인트라넷 접속’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호를 외치겠습니다. 좌파독재 저지하자. 자유 대한민국 살려내라. 좌파독재 중단하라. 정말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가 흔들려도 괜찮습니까? 법치주의가 무너져도 괜찮습니까? 우리의 자손들을 독재국가에 살아갈 수 있도록 넘겨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자식들을 가난과 질곡 속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까? 김정은 같은 그런 독재자 밑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 자손들을 지켜야 합니다.”

=>색깔론과 독재론과 경제 무능론을 뒤섞은 일종의 ‘공포 마케팅’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물러나라’는 말인 것 같은데, 황교안 대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교안 대표가 연설을 마치자 집회 참석자들은 펼침막을 앞세우고 청와대로 행진했습니다. 저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철 안에서 머리가 무척 무거웠습니다. 자유한국당이 태극기 부대에 흡수된 현장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자유한국당의 극우화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태극기 부대는 매주 집회를 열고 문재인 대통령 퇴진과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손잡고 대한민국을 적화통일하려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 내용은 평소 태극기 부대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날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자유한국당 당원들과 태극기 부대를 구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자유한국당 당원들 사이사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태극기 부대가 자연스럽게 뒤섞였습니다. 같은 구호를 외쳤고 같은 손팻말을 들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자꾸 태극기 부대로 변해가는 이유가 뭘까요? 극우화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선은 내년 총선을 겨냥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일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태극기 세력을 흡수해서 몸집을 키운 뒤 보수통합을 명분으로 바른미래당과 중도보수를 흡수하겠다는 계산이겠지요. 잘 될까요?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정보화 혁명 이후 기존 권력과 위계의 해체는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정치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무너지면서 지지자들의 분노와 격정을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과거 총재 시대의 정치가 포석, 중반싸움, 끝내기로 이어지는 바둑이었다면, 지금은 정치가 알까기로 전락했습니다. 과거 총재 시대의 정치에서 승자가 6을 차지하고 패자가 4를 차지했다면, 지금은 승자가 10을 다 먹겠다고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튼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도 지금 태극기 부대와 극우 성향 당원 및 지지자들의 분노와 격정 위에 올라타 있습니다. 격렬한 언어와 몸짓으로 당원과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또 당원과 지지자들의 분노와 격정에 다시 몸을 맡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자유한국당의 보수 혁신은 아무래도 이제 물 건너간 것 같습니다. 합리적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까요?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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