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로 당선된 이인영 원내대표가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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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265/ 이인영-황교안
이인영 “레프트 윙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옮겨” 선언
황교안 ‘80년대 운동권 썩은 뿌리’ 발언에 출마 결심
“임종석은 돈 벌어본 일 없는 사람” 황교안 발언 파장
임종석, 1995년부터 경제활동…2000년 국회의원 당선
황교안 대표 자신은 검사 출신 전관예우로 거액 벌어
1987년 전대협 대중주의 노선 6월 항쟁 성공 이끌어
정치 진출한 학생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꾸준히 진화
황교안 대표는 1980년대 공안검사 인식에서 멈춘 듯
지난 8일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로 당선된 이인영 원내대표가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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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는 남자 이인영입니다.
원내대표에 출마한다니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너부터 바꾸라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머리부터 바꿨습니다. 벌써 말 잘 듣지 않습니까?
염색하면 찍어준다는 유혹도 있었지만, 너의 변화를 입증하라는 주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발끝까지도 바꾸려고 합니다. 정치라는 축구장에서, 레프트 윙에서 옮겨 중앙 미드필더가 되겠습니다.
5월 4일, 진보정치의 정신적 기둥, 문익환 목사님, 김근태 의장님 묘소를 들렸습니다. 이제 중원에서 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역사의 약속입니다. 촛불 시민혁명의 완성은 국민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총선승리가 지상 최대의 명령인 시간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총선에서 승리해야 의원님들도 살아서 돌아오십니다. 변화와 통합의 길로 나가야만 총선에서 승리합니다.
요즘 만나는 분마다 다음 총선, 민주당이 쉽지 않다고 걱정하십니다.
“이 정도의 정당지지율에, 나 정도의 인물이면 당선되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안일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변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부터 변화를 결단합니다. 제 안의 낡은 관념, 아집부터 불살라 버리겠습니다.
저의 신념과 가치보다 우리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겠습니다. 실용과 중도를 저들에게 내주지 않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오래 생각했으니 망설임도 없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이기에 주저함은 더더욱 없습니다. 자유한국당이 극우로 갈 때 신속하게 중원을 장악하고 총선에서 승리하겠습니다.
“썩은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핵심 세력은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입니다.
이들 인맥은 정치권, 좌파언론, 시민단체, 민노총 등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되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발상과 혁신을 가로막습니다.
과거로 퇴행하는 정치에는 이들의 뿌리 깊은 카르텔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타협이나 협상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대결적 사고방식만이 지배합니다. 그들에게 협치란, 이들 집단 사고의 뿌리로부터 태어난 가시 꽃들의 향연일 뿐입니다.
소득주도 성장, 비정규직 제로, 공공일자리 확대, 탈원전...문 정권의 모든 국가 정책들이 이들 집단의 카르텔을 지키기 위한 포퓰리즘입니다.
선거법 등 3법 패스트 트랙 추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들의 생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어둠의 야합일 뿐입니다.
썩은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웁시다.
함께, 새로운 ‘대한민국의 봄’을 맞이합시다.
“오늘날 일류 국가가 되게 만든 게 여러분입니다. 50대 60대 이후 분들이 이 나라를 세워 왔습니다. 사회의 부족한 점을 파고들어서 우리나라를 무너뜨리려던 세력이 있습니다. 좌파 혁명세력입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권에 가면 혁명이론을 공부합니다. 싸우는 것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우는 것을 공부하고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이 좌파는 돈 벌어본 일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임종석 씨가 무슨 돈 벌어본 사람입니까? 제가 그 주임 검사였어요. 정상적으로 일해서 정상적으로 돈 번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싸워서 투쟁해서 뺏은 게 있는 거죠.
민변에서 민변 변호사들 잘살아요. 어떻게 잘 사냐.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고 해서 소송 걸라고 해서 소송비 받으면 우파 변호사들은 수임을 잘 못 하는데 하여튼.. 요약하면 우리는 싸움을 못 해 본, 나라 살리기만 전념한 사람입니다. 그게 나쁜겁니까? 격려를 해 주세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난 7일 오전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에서 '국민 속으로 민생투쟁 대장정' 기자회견을 하고 나서 시장 상인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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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25억 vs 임종석 7억…누가 더 돈 잘 벌었나
[the 300] 황, 검사-변호사-총리 연평균 1억원 수입…임, 시민운동-국회의원-서울시 경력으로 경제 활동
장외 투쟁을 하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임종석 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운동권을 겨냥해 “80년대 학생운동권은 혁명이론, 싸우는 것을 공부한다”며 “우리는 (나라를) 세우는 것을 공부하고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좌파는 돈 벌어본 일은 없는 사람”이라고 직격했다.
검사 출신의 황 대표와 총학생회장 출신의 임 전 실장의 삶, 특히 경제 활동의 궤적은 어떻게 달랐을까.
◇ ‘미스터 국보법’에서 ‘1억원 수임료’까지
황 대표의 사회생활은 1981년 사법시험 합격과 1982년 12월 춘천지방검찰청 검사시보로 시작했다. 황 대표는 대입에서 재수를 했지만 두드러기와 유사한 '담마진'으로 징집을 면제받았다. 사법시험 준비 과정에서도, 합격 이후에도 군 생활로 경력이 단절되는 일은 없었다.
이후 대검찰청 공안과장과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주로 공안검사로 활동했다. 황 대표는 공안 수사의 교과서로 불리는 '국가보안법 해설'을 저술해 '미스터(MR.)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임 전 실장과의 첫 인연도 임 전 실장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 과정에서 맺었다. 황 대표는 “임종석 씨가 무슨 돈 벌어본 사람이냐”며 “제가 그 주임 검사였다”라고도 말했다.
초임 검사는 임용 즉시 3급 공무원으로 임용된다. 3급 공무원 1호봉 월급은 지난해 기준으로 300만원가량이다. 13~15년차(호봉)이 돼야 도달하는 부장검사의 월급은 750만원 선이다. 황 대표는 2011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검찰을 떠난 황 대표는 2011년 9월부터 2013년 1월까지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던 때로 평가된다. 17개월간 근무하며 약 17억원의 자문·수임료를 받았다.
올해 초 한국당 당권경쟁 과정에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측이 제기하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황 대표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액수가 과해졌는데 법조계에서 초기에 나온 분들이 갖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해명했다.
황 대표의 ‘황제 수임’ 논란은 과거 청문회 등에서도 있었다. 황 대표는 1억3000여만원 정도를 기부했다.
2013년부터는 다시 공직에 몸담았다. 2013년부터 2년간 제63대 법무부 장관으로, 2015년 6월부터 2017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지난해 기준 국무총리 연봉은 1억7500여만원, 장관 연봉은 1억2900여만원이다. 황 대표는 현재 한국당 대표로 근무하며 당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황 대표의 총 재산은 대통령권한대행 당시인 2017년 마지막 공개된 것을 기준으로 25억2173만원이다.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한신아파트와 배우자가 보유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아파트 등이다.
◇ 돈 안 벌어본 임종석?…졸업하고 나서는
임 전 실장은 한양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9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고 대학 운동권 연합체인 전국대학생협의회 3기 의장을 맡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물론 당시에는 황 대표의 말처럼 ‘돈을 벌어보지는’ 않았다. 그가 기획했던 임수경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당시 한국외대 학생) 평양 방문으로 오히려 현상금이 걸린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송파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3600만원이던 당시 임 전 실장의 현상금은 1000만원이었다.
결국 체포된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수사를 황 대표가 맡았다. 결국 임 전 실장은 3년 6개월간 복역한 뒤 1993년 출소했다. 이 전과 기록으로 임 전 실장 역시 군 면제 판정을 받는다.
입학 10년만인 1995년이 돼서야 대학을 졸업한 임 전 실장은 첫 사회생활을 시민운동으로 시작한다. 1995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창립), 1999~2000년까지 푸른 정치 2000 공동대표를 맡았다. 황 대표만큼 많이는 못 벌었지만, 경제 활동을 이어간 셈이다.
2000년에는 16대 총선에 출마하며 제도권 정치에 입성한다. 만 34세 최연소 원내 입성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며 8년을 국회의원으로 지냈다. 2005년 기준 국회의원 수당과 입법활동비 등을 포함해 총급여는 월 700여만원 수준이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엔 당시 출범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정치자금법 재판 중인 것을 고려해(1심 유죄)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그의 정치자금법 재판은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며 최종 무죄 선고가 났다. 사무총장도 사퇴하며 ‘경제 활동 공백기’를 가졌다.
2014년에는 남측 방송을 대리해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캠프에서 활약한 뒤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돼 2015년까지 재직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연봉은 1억원이 넘는다.
2016년 20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도 사퇴했지만 결과는 낙선. 또다시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2017년 대선정국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 비서실장으로 영입됐고,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장관급인 비서실장의 연봉은 지난해 기준 1억2800여만원이다.
임 전 실장은 올해 4월 26일 공개된 재산등록사항에서 6억5000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취임 직후인 2017년 8월에는 4억3000만원을 신고했지만, 퇴임 시점인 1월 2억2000만원 늘어났다. 서울 은평뉴타운의 아파트 가액 변동, 급여 저축을 통한 예금 증대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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