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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1 19:02 수정 : 2015.01.15 14:33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

[짬] 미 미시건주립대 ‘글로벌 코리아상’ 김동진 헐버트기념사업회장

‘헤이그 파견’ 관여했다 추방
광복 뒤 절두산 성지에 묻혀
“한국학 창시자라 할만한 분”

유족들 모두 만나 자료 모아
평전 내고 책 번역해 출간 계획
“한국서 과소평가…꼭 기억해야”

김동진(64·사진) 헐버트기념사업회 회장은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한국학회에서 ‘2014 글로벌 코리아상’ 수상자로 뽑혔다. 이 상은, 한국의 발전과 세계화에 숨은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준다. 김 회장의 선정 이유는 “헐버트 박사의 잃어버린 역사를 발굴해 그를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한국학의 개척자로 재탄생시켰으며, 기념사업을 통해 국외 학자들에게 한국학 연구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고 그를 20세기 초 정의와 국제평화의 상징 인물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13일 시상식에 맞춰 출국을 준비 중인 그는 10일 “그분은 한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제대로 파헤쳐 세계에 알리고 일제의 침략과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이 그분 영향을 받았다. 그분은 한민족 아이덴티티(정체성) 형성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움을 줬다. 뛰어난 한글 연구자요, 한국학의 창시자라고 해야 할 그분은 한국인들이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가운데 한 분이지만,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호머 헐버트(1863~1949). 1886년 23살 때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받아 조선에 왔다가 훗날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파견된 그는 교육자요 언론인, 출판인, 그리고 <대한제국 멸망사>(더 패싱 오브 코리아)와 수백편의 관련 논문을 남긴 한국학 선구자다. 1907년 이른바 ‘헤이그 밀사’ 밀파사건 때 중요한 구실을 했다가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 42년 만인 49년 8월 한국 정부 초청으로 돌아온 그는 일주일 만에 병사해, 2살 때 서울에서 죽은 첫아들과 함께 지금 마포 양화진(절두산 성지)에 묻혀 있다.

“호프 메이라는 미시간주립대 교수가 지난 7월 전화로 수상 사실을 전해줬다.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메이 교수가 지난 1월과 5월 두 차례 서울에 와 나를 찾아왔다. 그는 ‘10명의 교수들이 파헤친 것보다 당신이 (헐버트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냈다’며 ‘당신 덕분에 한국이란 나라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해줬다.”

20세기 초 전지구적으로 전개된 ‘형제애 운동’을 연구하고 있다는 메이 교수는, 헐버트를 “정의와 국제평화의 수호자”로 재평가했다. “그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 보장과 맞바꾼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정권의 제국주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평생 한국 독립을 위해 애쓴 헐버트 박사는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인물이라고 했다.”

헐버트의 진면목은 김 회장이 2010년에 써낸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헐버트와 언더우드 등 서양 선교사들에 관심이 있었고 영어 공부도 좋아했다. 전주상업학교 시절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를 영어 원서로 읽고, 어떻게 외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왜 이런 인물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걸까 의문이 들어 언젠가는 제대로 연구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한일은행에 입사한 뒤 야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7년 만에 제이피(JP)모건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전신인 케미컬 은행으로 옮긴 뒤 23년간 근무하며 첫 한국지사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두번째 미국 근무 중이던 89년 그는 헐버트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체이스맨해튼의 감사위원이 한국어를 하는 사람을 찾는다기에 가보니 그의 손에 한글 편지가 들려 있는데 헐버트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한국 보훈처에서 광복 45돌 기념행사를 위한 국외 독립유공자 실태 파악을 하면서 외국인으로선 첫번째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받은(50년 3월) 헐버트 박사 유족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헐버트를 아느냐고 했더니 그 감사가 ‘내가 바로 그 손자’라고 했다.”

김 회장은 3남2녀를 남긴 헐버트의 유족들을 모두 만나 증언과 자료들을 모았다. “헐버트는 49년 우리 정부 초청으로 방한할 때 <에이피> 통신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했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한국어에 유창했고 한국 문학을 이해한 뛰어난 한글학자였다. 주시경 선생도 배재학당에서 출판을 맡고 있던 헐버트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국 최초의 한글 전용 교과서 <사민필지>를 쓴 이도 헐버트다. 패수(浿水)가 대동강이 아니라 압록강 너머 요동 쪽에 있다는 주장을 편 이도 그였다. 그는 한민족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이 결코 작은 중국(리틀 차이나)이 아니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도 뤼순 감옥에서 우리 민족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 헐버트라는 공술 기록을 남겼다.”

그는 “그분께 감사해야겠다는 생각, 예를 아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99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2004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헐버트는 지식인의 전형이요 표상이다. 지식인이란 지식만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헐버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한국인이라면 그를 꼭 기억하고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

헐버트는 한국과 관련한 책 15권과 논문 200여편을 남겼다. 김 회장은 그 가운데 조선시대에 관해 쓴 30편을 번역해 곧 책으로 낼 계획이다. 그동안 4차례 유족들을 서울에 초청한 그는 앞으로 관련 학술대회도 열고, 한글학회 등과 영어 남용으로 신문맹을 낳고 있는 현실에서 한글 바로 살리기 운동도 벌여나가겠다며 “너무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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