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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2 18:49 수정 : 2015.01.15 14:27

천명관

[짬] 영화 만드는 <고래> 소설가

“밑바닥 인생을 쓰는 것이 제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벌가 2세나 성공한 인물은 극히 소수인 세상이잖아요.”

그의 소설엔 대학 졸업자가 주인공 되는 일이 드물다. ‘고학력’ 시대에 그는 ‘저학력’의 주인공으로 거센 세파를 이겨내려 애쓰는 인물을 끈질기게 창조해낸다. 독자들은 그런 그의 소설을 읽고 희망보다는 ‘통쾌한 절망’을 느낀다. 그가 주는 절망은 ‘리얼리즘’이다. 환상의 현실이 아닌 죽기 살기로 살아야 하는 생활의 현실이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농촌 출신으로 도시에 올라와 사업에 실패한 가정의 3남3녀 가운데 대학물을 먹은 자식은 막내아들 한 명. 차남인 그가 악착같이 번 돈으로 막내 동생의 대학 학비를 보탰다. 자신은 지독한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쉰 살이 된 지금은 누구도 그를 고졸이라고 내려보지 않는다. 마음도 편해졌다. 나름 성공한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그는 “인생은 마흔 살까지 입니다. 오십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바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지난 2004년 마흔한 살에 소설 <고래>로 ‘마술적 리얼리즘’ ‘전혀 새로운 이야기꾼’이라는 찬사와 함께 한국 문단에 등장한 천명관(51·사진)씨가 자신이 만든 스토리로 영화감독에 도전한다. 역시 사회 밑바닥을 헤매는 주인공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난 뒤 전쟁고아인 구두닦이와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 두 명이 기지촌 건달로 자라나 80년대 조직폭력배의 거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가제는 <코리안 갱스터>. 이미 시리나오는 ‘6고’에 들어갔다. 보통의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최소한 ‘10고’에서 많이는 ‘30고’까지 고치고 다듬는다. 천씨는 20대에 보험외판원과 골프용품 점원 생활을 하다가 30대에 영화판에 뛰어들어 “감독 말고는 모든 일을 다 해봤다”고 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입니다. 충무로에 돌아다니는 시나리오 가운데 영화로 완성되는 작품은 3%에 불과해요. 그 희박한 확률에 도전하는 셈이죠.”

젊음의 생기가 휘몰아치는 서울 홍대앞 거리에서 만난 천씨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고교 졸업 때는 20%만이 대학을 갈 수 있었어요. 지금은 80%가 대학생이 돼요. 그렇다고 그 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다 만족한 삶을 사나요?”

30대부터 제작사 등서 연출 공부
데뷔작은 조폭 그린 ‘코리안 갱스터’
소설처럼 ‘밑바닥 인생’이 주인공

“고졸 콤플렉스와 끊임없이 싸워
소설가로 이 정도면 성공 생각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일 할 것”

그가 최근에 낸 단편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생 루저(실패자)들’이다. 그가 앞서 발표한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와 단편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주인공들 역시 대부분 실패자들의 이야기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비결이 궁금했다. “소설 쓰기는 전혀 힘이 들지 않았어요. 쓰면서 희열을 느꼈으니까요. 그냥 써 내려갔어요.” 그는 누구에게도, 어떤 학교에서도 글쓰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럼 타고난 유전자 덕분일까? 굳이 찾자면 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는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하셨어요. 그걸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는 30대에 1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제작사 신씨네·기획시대·영화세상·명필름 등에서 일했다. 하지만 한 편도 영화를 직접 만들지는 못했다. 그의 소설 <고령화 가족>이 영화화된 적은 있다. 그는 이제 소설가의 꿈은 이뤘다고 말한다. “소설가로서 이 정도 했으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영화화된 작품도 있구요.”

그는 고졸 학력 콤플렉스가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고 왔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아요. 많이 지쳤어요.”

그는 작품 <고래>의 주인공 가운데 한명인 ‘칼자국’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고단한 삶을 표현했다고 했다. “칼자국은 일본의 게이샤(기생)를 만나 사귀자고 했지만 그 기생은 ‘너 같은 조무래기’는 좋아할 수 없다고 해요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고 결심을 해요. 조폭 중간보스가 됐지만 그 기생은 “두목이 아니면 사귈 수 없다’고 했고, 다시 손가락 하나를 자릅니다. 그렇게 여섯개의 손가락을 자르고 나서야 오야붕이 돼 그 기생과 하룻밤을 자지요. 이튿날 아침 칼자국은 자신과 잔 기생의 얼굴이 노파인 것을 알고 절망해요. 자신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달려와 취한 여인이 결국은 할머니였죠. 그래서 또 손가락을 잘라요.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제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그가 오십대 들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기 때문이다. 영화판에서 지켜본 감독은 ‘슈퍼맨’ 정도의 강철 체력과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체력을 키우려 등산을 했고, 마음도 다잡았다.

“고졸에게 사회는 싸늘한 냉기를 뿜어 댔어요. 너무나 불친절했구요. 그런 싸늘함과 불친절과 싸운 지난 인생이었어요.” 그는 최근에 읽은 프랑스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씁쓸하게 웃는다. “인생이 오십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인생이 사십에 끝난다는 사실만을 빼고.”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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