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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09 19:20 수정 : 2015.01.15 14:23

김승락. 사진 겨레의 소리 축제 조직위 제공

[짬] 재일동포 뮤지컬 배우 겸 가수 김승락

“말도 하나, 노래도 하나, 핏줄~도 하나~.”

지난 3일 저녁 서울 성동구 소월문화관에서 열린 ‘성동 겨레의 소리-악(樂) 페스티벌’. 재일동포 뮤지컬 배우이자 가수인 김승락(49·사진)씨가 통일 노래 ‘희망의 길’을 공기를 가르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토해내듯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김씨는 객석을 향해 “조국에서 공연을 하니 감정이 더 격해진다”며 “오늘 이 자리에 서기 위해 그동안 공연 무대를 못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하다. 그가 부른 ‘희망의 길’은 1980년대 중반 총련계 금강산가극단에서 집단창작으로 만든 노래다. 그는 87년 금강산가극단 단원으로 방문한 평양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북한에 처음 소개했다. 북녘 동포들은 재일동포의 통일 노래에 열광했고, 그가 ‘희망의 길’을 부르는 모습은 여러 차례 북한 텔레비전에 방영됐다. 그는 어느새 평양 공연에 나서면 “북한 주민들이 공민증에 사인을 해달라고 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다.

바로 그 노래를 그가 27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아버지의 고향, 남녘 무대에서 다시 부른 것이다. 물론 그사이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던 김씨는 어느덧 원숙한 중년이 됐다.

올해 3회째인 ‘겨레의 소리’(예술감독 이철주)는 민족음악의 지평을 넓히고, 남과 북이 음악으로 소통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음악축제다. 이를 위해 출연자들은 참가곡 가운데 반드시 한 곡은 북한 노래를 편곡해 부르고 있다.

김씨도 이날 북한 노래(‘출발의 아침’), 남한 노래(‘칠갑산’), 전통 민요(‘새타령’), 그리고 자신이 일본에서 작사한 노래(‘선’·SUN)를 불렀다. 이런 다양한 음악은 그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갈등하고 충돌하는 다양한 사회를 모두 경험한 독특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노래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그의 노래는 그를 북한, 남한, 일본이라는 이질적인 사회를 모두 친구로 끌어안게 해준 동력이다.

그는 경북 봉화가 고향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성적인 총련 활동가였고, 어머니는 “이름과 국적을 조선으로 바꿀 정도로,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음악이 먼저 그를 이끌고 간 곳은 북한이었다. 그는 14살이었던 78년 학생소년예술단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다. 단원들은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발됐다. 그는 그 선발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고교를 졸업한 83년부터 총련계 대표 예술단인 금강산가극단에 들어가 가수로 활동했다. 85년부터는 1년에 한두달씩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 북한의 발성법인 ‘민성’ 등을 배웠다. 민요 ‘까투리 타령’을 멋지게 불러 북한 인민들로부터 ‘까투리 승락’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성동 겨레의 소리-악 페스티벌’ 참석
“조국에서 공연하니 감격스러워”
14살부터 예술단원으로 평양 공연
북에선 ‘까투리 타령’으로 유명인사
아내와 남북 무대 같이 서는 꿈 꿔

평양은 그에게 ‘민성’ 창법뿐만 아니라 부인 렴민화씨와 인연을 맺어주기도 했다. 렴씨를 85년 평양 음악강습을 위해 만경봉호를 타러 니가타로 가던 도중에 처음 만난 것이다. 둘은 금강산가극단에서 함께 활동하다 95년 결혼했다.

그는 96년 금강산가극단을 그만두었다. 무언가 정해진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위한 도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우연한 오디션 기회를 거쳐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이 일본 최대 극단인 ‘시키’(四季)였다. 그곳에서 김씨는 그야말로 도전하는 자세로 새로운 기록들을 만들어갔다. 그는 ‘김승락’이라는 조선 이름으로 뮤지컬 <미녀와 야수>에서 주연 야수 역을 따냈다. 극단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6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의 해였다. 그는 이때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는다. 당시 국내 최초의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개관한 서울 잠실 샤롯데극장에서 뮤지컬 <라이온 킹>을 장기 공연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 땅에서 뮤지컬 배우로 당당히 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조선적을 유지하겠다는 부인 렴씨는 그런 남편의 결심을 “부정도 못하고 인정도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부는 국적을 달리한 채 함께 살아오고 있다.

2013년 그는 극단 시키를 떠났다. ‘1인 노래극’ 형태로 자신만의 노래를 좀더 실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뒤 지금까지 4번의 공연을 했고, 모두 1천여명 이상이 그의 새로운 실험을 객석에서 지켜봐줬다.

김씨는 그의 이런 다양한 음악 경험이 남북이 화해하고 교류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사실 겨레의 소리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그런 바람의 일부가 실현된 것이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꿈일 뿐이다. 겨레의 소리 쪽에서는 애초 김씨와 함께 부인 렴씨도 초청했지만, 조선적에 대한 남한 정부의 입국거부 방침 때문에 부부는 끝내 무대에 같이 서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국적이 다른 부부가 남녘과 북녘 어디서든지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은 접지 않았다. 그렇게 꿈꾸는 것이 많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조국통일을 기대하며 조선적을 고수한 채 세상을 떠난 선친과 장인 어른의 뜻을 조금이나마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 부부의 노래의 힘이 남북을 조금은 더 가깝게 만드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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