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화씨. 사진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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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동티모르 ‘피스 커피’ 공정무역 개척
한국YMCA 양동화 씨
“2003년 방한한 초대 대통령에 연민”
현지어 배우며 주민들과 동고동락 말뜻도 모르고 패싸움만 하던 주민들
긴 생머리 자르고 함께 밥먹으며 소통
떠났던 청년들 돌아오며 자립공동체로 그는 2007년 전국연맹 내부공모 때 자원해 남성 활동가와 함께 선발됐다. 애초 국외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20대 미혼 여성인 그를 ‘위험지역’에 파견하는 것을 연맹은 주저했다. 하지만 그는 “빡, 빡, 우겨서” 갔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2000년부터 순천와이 어린이·청소년 간사로 활동했다. 독립 직후인 2003년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샤나나 구스망)이 순천을 방문했다. 그런데 초청한 지역의 시민단체가 의전을 제대로 못해 뒤늦게 순천와이에서 대신 진행하게 됐다. 그때 강연회의 청중 동원을 도왔는데, 한 나라 국가원수라기에는 대통령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 상황도 떠오르며 동티모르에 대한 관심과 연민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애초 동티모르 와이 조직 사업은 독립을 지원했던 오스트레일리아팀에서 2000년부터 시도하다 포기하고 철수한 상태였다. 2005년부터 한-일 와이가 공동으로 ‘재건 프로젝트’를 맡았다. “뭔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는데 우리는 ‘평화운동’으로 방향을 정했다.” 하지만 현지 적응의 첫 단계인 언어 익히기부터 녹록지 않았다. 테툼어라는 고유어가 있긴 하지만 포르투갈을 거쳐 인도네시아까지 500년에 이르는 식민지배로 문화와 전통이 말살된 까닭에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었다. “지명 ‘사메’의 뜻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자원봉사로 어린이 대상 교육을 하려고 보니 공용어로 된 교과서나 동화책도 없었다.” 첫 사업으로 수도 딜리에 어린이도서관을 짓고 인도네시아어로 된 동화책을 번역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언어 소통이 가능해지자 식민지배의 더 심각한 폐해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앞에서는 ‘예스’라 답하지만 실제로는 ‘노’이고, 약속을 하지만 지키겠다는 뜻은 아니고… 한동안은 모두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같아서 분노로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오랜 식민지배의 트라우마로 절대 책임질 말이나 일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문제는 주민들끼리의 불화와 일상화된 폭력이었다. “우리 센터 사무실 앞에서 오후 4시만 되면 일과처럼 패싸움판이 벌어졌다. 때로는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했다. 그러다 일요일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들 성당에 가는 식이다.” 함께 파견됐던 남자 활동가는 1년 만에 귀국해버렸다. 하지만 그는 한 70대 원로의 얘기를 듣고서 마음을 다잡았다. “포르투갈 지배 아래에서 우리는 그저 짐승이었다”, “절대로 적을 만들지 말라. 단, 적이 생기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오직 살아남고자 개인주의, 이기주의만 남은 것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주민들을 마음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초기 6개월은 말을 못해 왕따를 당했고, 나중엔 나를 지키기 위해 왕따가 됐다. 동네 청년들이 귀찮게 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긴 생머리 여성에 대한 선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 손으로 빡빡 밀어 삭발을 해버렸다. 단전·단수가 잦아 긴 머리를 간수하기가 어렵기도 했다.” 현지인들은 ‘경악’했고, 동료 활동가들은 ‘창피하다’ 했지만, 그는 비로소 자신있게 현지인들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여자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것이다. “국제적인 엔지오들의 수칙에서는 절대 현지인들과 의식주를 함께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민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한국 특유의 ‘밥상공동체 문화’를 낯설어하면서도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밥숟가락에서 인심 난다고 했듯 정이 싹트니 신뢰가 쌓였다.” 그렇게 주민들과 소통을 통해 마을 재생을 위해서는 공동체 복원이 시급하고, 수익사업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2006년부터 원두만 일부 수입했던 커피 공정무역을 주민 자립의 수단으로 삼기로 했다. 유기농 이전에 야생 그대로인 현지 원두를 특화하고자 ‘피스 커피’로 이름지었다. 2008년 사메에서도 6~7시간 걸어 들어가는 로투투마을(300여가구)·카브라키마을(120여가구)과 협약을 맺고, 커피 수확과 수매를 위한 공동작업장을 열었다. “국내 금융위기 때 환율이 치솟았다. 그 이듬해엔 현지 이상기후로 30톤이던 수확량이 1톤도 채 안 됐다. 위기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전국연맹에서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고 계약대로 원두값을 꼬박꼬박 지급해줬다. 주민들이 먼저 미안하다며 돈을 안 받겠다고 했다. 전화위복이 됐다. 주민들이 토론이나 회의 때 아이디어도 내고 이의 제기도 했다. 그제야 잘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현재 피스 커피는 국내 250여곳의 카페에 공급되고 대형 할인매장에서도 팔리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제휴해 마을에 태양광발전소도 설치했다. 할 일과 안정된 수입이 생기자 젊은이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발 1004m에 자리한 마을 사무실 겸 그의 숙소는 ‘천사의 집’이라고 불린다. 수년째 그의 발목을 잡았던 후임자도 나왔고, 현지인 활동가도 21명을 키워 안착시켰다. 그 가운데 여성도 6명이나 된다. 그런데 그가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이 너무 많이 들어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는 걸 느꼈다. 주민들 스스로 운영하도록 맡겨줄 때가 됐다. 그게 우리가 목표한 지속가능성이니까.”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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