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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전쟁없는 세상이 될 때까지 나는 감옥에 갈 수밖에…”

등록 2015-04-29 19:08수정 2015-04-30 15:58

송강호 박사. 사진 김경애 기자
송강호 박사. 사진 김경애 기자
[짬] 국제평화운동 공동체 개척자들 송강호 박사
그의 행보는 반전의 연속이다. 고교 때 교회 고등부 회장을 맡고 있던 짝꿍을 만나 예수를 영접했다. 민감한 사춘기에 ‘회심’(깨달음)을 경험한 그는 집안의 반대까지 무릅쓴 채 ‘신학’을 전공했다. 보수 교단 소속이었던 첫 교회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1970년대 말 군부독재 상황과 신학교에서의 배움은 괴리가 컸다. ‘회의’가 들어 기독교교육과로 전과를 한 뒤 대학원에서는 아예 교육철학을 전공했다. 1993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해 ‘실천신학’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에큐메니컬적인 회심-다문화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변혁적인 학습’이다.

정통 신학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이력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모습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세차례나 옥살이를 한 투쟁가다. 구럼비 바위 폭파공사를 막기 위해 앞바다에 뛰어들고, 경찰의 무리한 연행과정에서 이빨이 부서지는 수난을 겪으며 온몸으로 현장을 지켜왔다. 98년께부터 함께하고 있는 국제평화운동 공동체 ‘개척자들’에서는 철인 3종 경기와 산행, 공동체 생활 등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평화전사’를 키운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력을 하나로 엮어주는 주제는 ‘평화’이고, 그의 직업은 ‘평화활동가’다. 송강호(57) 박사의 삶이다.

‘보수신앙’ 지녔던 정통 신학박사에서
전세계 분쟁현장 달려가 ‘평화전사’로
“분쟁은 인류가 만드는 최대 고통” 절감

2011년 강정마을 이주 세차례 투옥
“제주~오키나와~타이완 연대 제안”
평화메시지 전파할 범선 기금 모금중

“93년 서울 보광중앙교회에서 청년부 전도사를 맡아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모임’(WCF)을 시작했어요. 이듬해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 가서 실제로 겪어보자’는 말을 남기고 독일로 유학을 갔죠. 분쟁이야말로 인류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인간끼리 다투는 분쟁지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로 그해 르완다 내전이 터지자 진짜로 청년회원들이 현지에 가보자고 찾아왔어요. 그래서 전례없는 휴학을 하고 함께 나섰어요.”

98년 말 그가 귀국했을 때도 보광교회 청년들의 기도모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99년 영남신학대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청년들 6명도 이들과 의기투합했다. “강의를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수강생들이 분쟁 현장으로 가겠다며 하나둘 떠나버려서요.” 그렇게 “한줌”의 청년들이 미군 천막을 치고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 ‘개척자들’이 탄생했다.

개척자들은 2000년 갓 독립한 동티모르를 시작으로 보스니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카슈미르, 그리고 아이티 등 전쟁과 재난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평화캠프를 열어 고통과 고난을 스스로 이겨낼 ‘피스메이커’를 양성하고 있다.

“2005년 아체에서 쓰나미 이재민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꼭 가봐야겠다고 반겼다. 그런데 2006년 봄 찾아온 제주 강정마을은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마을 공동체가 파괴돼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었다. 평화교육을 하고 싶었으나 여건이 되지 못했다.”

결국 2007년 정부는 강정 앞바다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주민들이 5년째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던 2011년 개척자들은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주요 사역활동으로 결정했다. 2명의 간사와 함께 파견된 송 박사는 2011년 3월께 아예 강정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지금껏 운동에 동참해왔다.

강정마을은 2010년 이후 650여명의 주민들이 연행됐고 200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재판을 받아야 했고, 부과된 벌금의 총액만 3억원을 넘고 있다. 그 역시 강정마을 해양감시단 활동중 2011년 7월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2014년 4월 구럼비 바위 발파 저지 과정에서 연행됐다가 5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2013년 7월 재구속돼 지난해 4월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았다.

“나는 지금 제주교도소에 갇혀 이 비무장 평화의 섬들의 연대를 꿈꾸고 있다. 내가 작년 가을 출옥할 때에도 나는 다시 수감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땅에 군대 없고 기지 없고 전쟁 없는 곳이, 하나라도 만들어지지 않는 한 나는 다시 이 감옥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 한반도가 그리될 수 있기까지는 아득한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주도만큼은 반드시 나와 같이 전쟁 없고 군인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이는 숱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수감자들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평화의 유배자들을 위한 비무장 평화의 섬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나는 이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신앙과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옥사로 내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한 사람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나는 끝까지 비무장 평화의 섬을 만들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2013년 7월·비무장 평화를 위한 섬들의 연대 취지문)

그는 최근 ‘비무장 평화의 섬 연대’를 주창하며 제주를 넘어 대만(타이완)과 오키나와를 잇는 국제적 평화운동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2013년 강정에서 열린 첫번째 평화대회에서 두 지역 대표들에게 연대를 제안한 이래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제주도~오키나와~대만을 순항하는 평화 항해를 위해 올해는 시험 단계로 국내 구간에서 범선(세일링 보트)을 운항할 계획이다. 송 박사와 여성 활동가 2명을 포함해 대원 10여명을 선발해 운항 훈련을 시작했다. 가칭 ‘평화의 메신저호’를 장만하기 위해 한·중·일 평화항해 모금 콘서트를 전국 순회 개최하기로 하고, 지난 25일 광주에서 첫번째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평화가 가장 필요한 곳은 분쟁과 고난의 현장이고, 기독교인이 가장 있어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이 운동이 한·중·일뿐만 아니라 평화의 미래를 꿈꾸는 모든 세계시민들과 더불어 끝까지 싸워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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