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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려인은 한글 알아야”…우리말 배우러 온 카레이스키 선생님

등록 2015-06-17 21:18수정 2015-06-18 14:03

고려인 한글학교 교사들이 16일 오후 한국어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캠퍼스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다. 왼쪽부터 정안나(우즈베키스탄), 심이리나(러시아), 정졸리나(우즈베키스탄), 박리디야(카자흐스탄).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고려인 한글학교 교사들이 16일 오후 한국어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캠퍼스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다. 왼쪽부터 정안나(우즈베키스탄), 심이리나(러시아), 정졸리나(우즈베키스탄), 박리디야(카자흐스탄).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짬] ‘밥에물이’를 아시나요? 러시아·CIS에서 온 한글학교 교사들
‘밥에물이’.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에서 온 4명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이 말을 알고 있었다. 서로 2000~3000㎞ 떨어진 곳에 살고 있지만 이들은 이 말이 ‘찬물에 밥을 말아 먹다’라는 걸 잘 알았다. 이들 모두가 카레이스키(고려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식사를 했고, 이들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쌍둥이 자매 정안나(30·사진 왼쪽부터), 러시아에서 온 심이리나(39), 쌍둥이 자매 정졸리나(30), 카자흐스탄에서 온 박리디야(54)가 16일 오후 이화여대에서 한글 수업을 끝내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재외동포재단이 전세계 한글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이화여대 언어교육원에서 11주 동안 진행하는 한국어 교사 역량 강화를 위한 연수에 참가하고자 이달 초 한국에 왔다.

재외동포재단 초청 ‘한국어 교사’ 연수
“부모에게 배워 ‘밥에물이’ 뜻도 알죠”
옛소련 강제이주당한 아픔 듣고 자라

카자흐스탄 리디야 “첫 방한 때 슬펐다”
러시아 이리나 “고려인은 한글 알아야”
우즈베키스탄 쌍둥이 자매도 함께

이들의 부모세대들은 왜 중앙아시아까지 갈 수밖에 없었을까? 1937년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 스파이를 막는다며 연해주에 살고 있던 한인 18만명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주열차에는 먹을 것은 물론 화장실도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겨 도착한 그곳에는 살 곳도 일할 곳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추위를 피해 땅굴을 파고 살아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카자흐스탄 한글학교 교사인 리디야는 할머니에게 들었다며 그때 상황을 전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연해주에서 이곳으로 올 때 소련 정부에서는 그 어떤 것도 못 갖고 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씨앗을 챙겨 왔답니다. 그 씨앗으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버려진 황무지와 갈대밭을 일궈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강인한 정신력과 특유의 적응력으로 일어섰다.

그는 2007년 첫 고국 방문 때를 기억한다. 70여년 전 이 땅을 떠나야 했던 조부모와 부모를 떠올렸다. “한국에 와서 너무 슬펐습니다. 한참 울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한 분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이 많이 슬펐습니다.”

이주 3~4세대인 이들은 어떻게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게 됐을까? 러시아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서 역사 교사를 하고 있는 이리나의 기억은 이랬다. “2005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분이 ‘당신은 고려인이다. 고려인은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너무 어렵습니다.”

리디야는 2005년부터 딸과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딸은 카자흐스탄 국립대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마케팅을 전공했습니다. 경희대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뒤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나보다 훨씬 한국어를 잘합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영어 교사인 안나와 졸리나 자매도 거들었다. “아버지는 한국말을 거의 못하십니다. 그래서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자매에게 ‘한국말을 꼭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같은 고려인 분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어 문법은 어순이 같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분이 한국어를 배울 때보다는 조금 쉬운 것 같습니다.”

이들은 언제 한글학교 교사로서 보람을 느낄까? 이리나는 답했다. “지난해 9월1일 볼고그라드에서 한글교실을 열었을 때 학생 180여명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35%는 고려인이었고, 나머지는 러시아, 체첸, 타타르 같은 다른 민족이었습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이었지만 77살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6~8시에 수업을 했습니다.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면서 한글을 배워야 하니까 힘들었습니다. 지난 5월25일 졸업식이 열렸는데 35명만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한글을 배워 졸업장을 탄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안나도 기억을 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은 우르겐치입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1000㎞ 떨어진 시골도시입니다. 한글학교에 다니는 중학생 고려인 학생 2명이 다음달 한국에 옵니다. 재외동포재단에서 만든 일주일 인터넷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아주 시골지역이어서 여권을 갖고 있는 아이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이 여권을 갖게 됐다며 너무 기뻐했어요.”

현재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 곳곳에서는 한국 드라마와 가수가 인기를 모으며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리나의 추억. “아이들이 한국어 문법을 배울 때 가장 많이 좋아하고 활용하는 게 바로 한국 노래 가사의 뜻을 알게 됐을 때입니다. 한글 단어와 한국어 문법을 배운 뒤 ‘이 노래를 이해하게 됐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예쁜 아이들입니다.” 리디야도 덧붙였다.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한국 드라마를 봅니다. <꽃보다 남자> <대장금> <시티헌터> 같은 드라마가 여전히 인기예요.” 안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으로 ‘빅뱅’을 들었다.

‘한국어 선생님 4인방’은 한글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 정체성을 찾게 됐다고 했다. 이리나는 말했다. “서른 때까지는 한국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글을 왜 배워야 하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한글을 배우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저는 러시아에서 고려인을 보면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많이 얘기합니다. 고려인 학부모한테도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보내주세요’라고 많이 말합니다.”

이들이 한국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리디야가 입을 뗐다. “고려인들에게 한국의 글과 말,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언어와 문화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조상의 모국을 잘 알아야 다음 세대에게 한민족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습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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