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6.28 19:32 수정 : 2015.06.28 19:32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이철 회장

[짬]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이철 회장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봐 아예 내가 데리고 들어갔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성북구 정릉동 가톨릭 수녀 공동체인 성가소비녀회 안에 있는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숨’에 모인 100여명은 그의 재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40년 전인 1975년 12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재일동포 유학생 이철(67)은 두달 뒤 숙명여대에 다니던 민향숙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돼 있었으나, 영문도 모른 채 공안당국에 붙잡혀 가 사형수가 됐다. 그리고 13년간 옥살이를 했다. 당국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민씨마저 잡아가 ‘간첩 방조죄’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살게 만들었다.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간첩, 간첩 방조 등 혐의로 기소돼 1977년 사형을 확정받았던 이씨가 낸 재심청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이씨는 설립 두돌을 맞은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유엔이 선포한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가 함께 열린 이날, 치유센터는 이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재일한국인 양심수 동우회’가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를 중심으로 1990년에 결성돼 현재까지 재일동포 고문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재심 지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해오고 있다”며 감사패 수여 이유를 밝혔다.

40년전 유학왔다가 간첩으로 몰려
예비신부는 간첩방조죄 누명
옥살이 13년, 결혼식도 13년 지각

1990년 모임 결성 피해자 지원
재심청구…최종 무죄 판결 앞둬
“‘유학생간첩’ 모두 무죄가 된 셈”

이씨는 수여식에서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25년째 대표 자리를 독차지하며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는 너스레로 좌중을 또 한차례 웃긴 뒤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결코 암울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23일의 고법 재판 때문에 22일 입국한 그는 26일 출국하기 전 “요즘 나라가 다시 과거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걱정들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아베 정권하의 일본 사회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한국마저 10년간의 민주정부가 이룩했던 성과들을 파괴하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양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다시 예전처럼 공안세력들이 날뛰는 세상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나는 민단 쪽 사람으로 진짜 한국인이 되고 싶어 조국에 유학을 왔던 것인데, 오직 정권의 필요 때문에 자기방어력이 없는 약자였던 우리를 무더기 간첩으로 날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그들의 어버이들이 그 충격으로 비명에 가는 등 부모 형제들이 함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김근태 선생 이름이 들어간 치유센터로부터 이런 걸 받는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다. 징역살이한 것밖에 없는 내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 비슷한 고초를 치른 백수십명의 재일한국인 양심수들, 그리고 그들의 구명과 지원을 위해 40년간 고생해온 수많은 일본 후원자들이 함께 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내가 아니라 그들의 대표로 받는 것이고 그들 모두가 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히 받기로 했다.”

서울에 유학중이던 그가 ‘간첩’ 혐의로 붙잡혀 구속됐다는 소식이 일본 매스컴에 보도되자 오사카에서 함께 고등학교를 다닌 일본인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그를 살리자는 후원회(구명회)가 만들어졌다. “일본 전국에서 모두 17개 구명회가 만들어져 1년에 한번씩 전체 모임도 가졌다. 내가 석방된 뒤 해체된 곳이 많지만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사카·고베 지역 모임은 남아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기념식장에서 이씨는 일본에서 함께 온 후원회 이시이 히로시 대표를 연단으로 불러냈다. “머리가 벗겨지고 하얗게 세었지만,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내 고교 후배다. 도쿄에 가 있다가 내 소식을 듣고 구명작업을 시작한 사람이다. 동참자들이 동창, 이웃사람, 직장인들로 점차 확산되면서 구명회들이 만들어졌다.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감사패는 이들이 받아야 한다.” 이번 서울행에는 역시 유학 왔다가 비슷한 고초를 겪은 재일동포 유영수씨도 동행했다.

이씨는 재일한국인 양심수 동우회 회원은 120여명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재심 청구로 무죄를 받은 재일한국인 양심수는 나처럼 아직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진 못했으나 1,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26명 정도다.” 유학생뿐만 아니라 일본이 연관된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400~500명을 헤아리는데, 이는 한때 이른바 ‘한국 시국사범’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기도 했다.

재심과 관련해 이씨는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모두 따로 재심을 신청하는 건 번거로울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별법을 만들든지 해서 한꺼번에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에 재심 청구를 망설였으나, 무죄판결 선례를 받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이석태 변호사 등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7월의 고법 선고판결과 대법 최종판결이 남아 있지만 이씨를 비롯한 재일한국인 양심수들의 무죄판결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역사적으로는 사실상 모두가 무죄라는 판결을 이미 받은 셈”이 됐다.

‘일본의 초국가주의’에 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다가 졸지에 간첩이 되고 사형수가 된 유학생 이철. 사형에서 20년으로 감형됐던 그는 ‘6월항쟁’을 정점으로 한 민주화운동이 가져다준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선 뒤인 1988년 10월 석방됐다. 결혼식도 13년을 기다린 끝에 그 직후 치렀다. “한 분도 아니고 김수환 추기경,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등 많은 신부님들이 앞다퉈 우리 결혼식을 축복해주었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1남1녀를 두고 지금 오사카에서 살고 있는 이씨는 전기공사를 하는 동생의 회사에 다니면서 가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부인 민씨와 열심히 살고 있다. 조국에서의 대학원 졸업과 학업의 꿈은 일찌감치 물거품이 됐지만.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