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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4 18:18 수정 : 2019.08.04 19:35

[짬]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강성만 선임기자

“100년이 넘도록 국가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민족과 역사에 무책임한 일입니다.”

씨알사상연구소장인 박재순 목사의 말이다. 그는 2002년 씨알사상연구회(2007년 연구소 개칭)를 만들어 함석헌과 류영모 선생의 사상을 밝히고 알리는 데 힘써왔다. 한신대에서 반나치 행동가이자 저항 신학자인 본 회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최근 두 권의 책 원고를 마무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삶과 사상을 다뤘고, 다른 하나는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파고들었다. “도산 연구는 4년 전부터 했어요. 그때부터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 흥미를 느껴 지난 1년 6개월은 이 문제만 집중했어요.” 지난 30일 서울 수유역 부근 자택에서 만난 박 목사는 “연구 결과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애국가 작곡자는 안익태이지만 작사자는 미상이다. 이승만 정부가 1955년 조사위를 꾸려 작사자를 가리려 했지만 결론을 유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표결에 부친 윤치호 단독 작사설이 찬성 11, 반대 2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해서다.

64년이 흐른 현재 애국가 작사자 논의는 윤치호(1866~1945)설과 안창호(1878-1938)설이 맞서있다. 윤치호가 1908년 낸 <역술 찬미가>에 애국가 가사가 실렸고,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가 발견된 점 등이 윤치호설을 떠받든다. 안창호설은 상대적으로 문헌 자료는 적지만 도산이 애국가 보급에 앞장섰다는 점과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 뼈대를 이룬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작년 대한민국학술원통신 4월호에 실린 ‘애국가 작사는 누구의 작품인가’라는 기고에서 ‘한양가’ 등 안창호 작 가사들의 내용과 애국가 가사의 기본 생각과 시상, 표현이 거의 일치한다면서 애국가는 도산 작이라고 주장했다.

박 목사가 연구에서 기존 논의를 뒤집을 실증 자료나 증언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도산이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1897~8년 작 추정) 후렴구(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가져와 애국가(1907~8년 작 추정) 본 가사를 지었으며 도산과 윤치호 사이에 작사자는 ‘윤치호 이름으로 하든지 숨기기로’ 합의했다.”

도산 안창호.

실제 두 사람은 ‘애국가 작사자냐’는 질문에 명시적인 답을 하지 않았단다. 박 목사는 이런 모습은 안창호설을 받아들일 때 자연스럽다고 했다. “서북 평민 출신인 도산은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호세력인 이승만 쪽 사람들로부터 ‘지방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란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어요. 조선 500년을 지배한 기호세력의 견제와 비판 대상이었죠. 이 때문에 자신이 열렬히 애국가를 보급하면서도 작사자란 사실을 밝히기 어려웠을 겁니다. 기호세력의 중심인물 윤치호를 앞세울 필요가 있었겠죠.”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애국가 후렴구를 윤치호가 쓴 점도 도산이 자신을 작사자로 내세우기 어려운 이유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연구에서 안창호와 윤치호의 심리·철학과 그들이 쓴 가사와 애국가 가사의 비교 분석에 비중을 뒀다. “자기 헌신과 희생을 다짐하는 애국가 시상은 도산의 이후 작품인 ‘국권회복가’ ‘수절가’ 등의 가사에도 동일하게 나타나요. 반면 윤치호가 쓴 무궁화가는 자연주의입니다. 애국가의 초월주의 태도와 달라요.” 말을 이었다. “윤치호 작 무궁화가와 코리아는 둘 다 황실 찬미가입니다. 자연에 맞춰 모든 걸 설명하죠. ‘애국하는 열심의기 북악같이 높고 충군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무궁화가 중) 가사에서 보듯 백두산과 동해물이 표준이죠. 하지만 애국가는 4절까지 다 자연물을 극복하는 초월주의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는 객관적 상황을 초월해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간절하고 사무친 심정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요. 도산이 1906년 쓴 대한인신민회 설립취지문에도 애국가와 비슷한 ‘심(心)을 토하고 피를 말려서’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런 말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윤치호에겐 정치적 독립이라는 과제가 사라졌어요.”

그는 도산의 애국가 보급 열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도산은 1907년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 결성을 위해 귀국할 때 새로운 애국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말만으로는 국민을 깨어 일으킬 수 없다고 봤어요. 노래나 국기 같은 상징이 필요하다고 했죠. 1919년 임정 내무총장 시절에는 그가 주도해 매일 조회할 때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어요. 흥이 나면 더 부르기도 했죠.”

스승 함석헌 사상의 뿌리 찾아
도산 연구하다 작사자 문제에 관심
1년6개월 탐구해 책 1권 분량 원고

“사상과 가사 비교, 역사 맥락 봐서
윤치호 아닌 안창호 작 확신해
‘작사자 미상’ 역사에 무책임한 일”

화제를 돌려 함석헌과 류영모 공부에서 왜 도산 연구로 방향을 틀었는지 물었다. “함 선생은 늘 자신의 스승은 도산과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이라고 했어요. 도산과 남강이 다 교육독립운동을 했고 자신도 그 길을 따르고 있다고 하셨죠. 함 선생에게 이어진 도산의 정신이 궁금했어요.”

도산 연구는 그가 오랜 기간 품은 의문 하나에 답을 주었단다. “대학 4학년 때 만난 함 선생과 그의 스승 류영모 선생을 연구하며 가장 궁금한 게 두 분이 다 나를 중심 혹은 전면에 놓는다는 점이었어요. 어떤 철학자나 신학자도 그처럼 나를 강조하지 않았어요. 두 분은 민주적 주체,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강조했죠.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했어요. 불교는 멸아, 무아로 자기를 지우려고 했잖아요. 유교는 극기나 수기죠. 자신을 억누르고 닦으라고 합니다. 도교는 무위자연으로 도에 순응하고 적응할 것을 강조하죠. 기독교는 죄인으로서의 자아입니다. 나가 강조될 수 없어요.”

안창호 연구에서 얻은 답은 뭘까? “도산이 ‘나의 철학’을 정립했더군요. 나라가 망해 일제 식민지가 되는 상황에서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체로 일으켜 세워 독립과 통일을 이루려고 했어요. 안창호 별명이 ‘통일독립’이었다고 해요. 통일과 독립을 강조했다고요. 도산은 흥사단 신입 단원 면접을 볼 때도 이 나라와 민족을 누가 구하느냐, 누가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계속 물었어요. ‘나’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요. 도산은 ‘나’가 나라의 주인이니 나라의 모든 것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했죠. 심지어 이완용이 나라 팔아먹은 것도 ‘나’가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로 불리다가 1935년 안익태가 지금의 곡을 붙였다. 안익택는 친일파 낙인에 이어 최근엔 친나치 행적까지 드러났다. “작곡자에 문제가 있다면 곡을 바꿀 수는 있겠죠. 애국가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켜주고 키워주었어요. 독립 의지와 정신을 담아 계승시켜 준 굉장히 중요한 정신유산입니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 선생은 애국가가 종교적 열정을 일으킬 만큼 감동을 줬다고 했어요. 요즘은 태극기 부대가 열심히 애국가를 부르더군요. 태극기 부대에 애국가나 태극기를 넘길 일이 아닙니다.”

“실증 사학으론 역사 진실 못 밝혀
신채호·함석헌처럼 전체 맥락 봐야”

그는 ‘애국가 작사자 미상’의 현실을 두고 ‘학문의 열등’ ‘정신적 결함’이란 말까지 썼다. 그가 보기에 이런 상황을 부른 주된 원인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문헌 자료를 중시하는 실증사학에 함몰”되어서다.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도한 이가 실증사학자 이병도와 친일파 백낙준, 서정주였어요. 실증주의에 갇혀선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어요. 지금 역사학은 의미나 목적 그리고 정신을 말하지 못한 지 오래 됐어요.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함석헌 선생처럼 역사의 전체 맥락을 봐야 합니다. 실증사학은 역사의 껍데기만 보고 있어요.”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전두환 정권 초기 이른바 한울회 사건으로 2년 6개월 옥살이를 했다. 중·고교생 20여명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전두환 정권 비판 발언을 한 게 ‘반국가단체 결성’ 범죄가 됐다. ‘5공 검찰’은 이 공부 모임에 참여한 이규호씨의 대학 졸업논문(‘현대의 공동체론’)에 나오는 마르크시즘 이론을 문제 삼아 박 목사 등을 반국가단체 결성 범죄자로 몰았다. 이 때의 고초로 박 목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화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양승태 휘하 사법부는 2015년 이 사건 재심에서 반국가단체 구성에 대해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분노가 컸겠다고 하자 박 목사는 “이런 아픔을 겪은 제가 어떻게 실증주의에만 머무를 수 있겠어요”라고 소리를 높였다.

교회는 나가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류영모 선생은 교회도 졸업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교회를 다니며 배울 만큼 배웠으면 졸업해야지 계속 다니는 것은 어린애나 하는 일이라고요.”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물어보자 이사야 53장을 말했다. “외모가 보잘 것 없거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의 상처를 씻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난은 죄나 무능력, 불운과 연결되었어요. 이사야 53장의 해석이 바로 성경의 진리이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열쇠이기도 하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도 고난을 당해 민중의 자기 이해가 이처럼 나타난 것 같아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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