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7 18:55
수정 : 2019.08.09 10:10
【짬】 오가헌 오옥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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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옥순 오가헌 대표.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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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10년 전 우연히 고향에 들렀다가 도심 속 옛집의 근황이 궁금했다. 여고에 다닐 적에 아름답게 느껴졌던 일본식 가옥을 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싶었다. 그런데 그 집은 사라지고 주차장이 들어서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단아한 한옥을 수소문했다. 개량 한옥 한 채를 소개받았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근대 한옥 앞 고택을 보는 순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잡풀이 무성하고 오동나무가 길게 자란 그 집에서 한옥의 ‘기품’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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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에 지어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오가헌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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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팔지 않을 집”이라고 했다. 1년 동안 기다려 2009년 빈집을 인수했다. 고택 주변 집을 어렵사리 매입해 공간을 1719㎡(520평)로 늘려 한옥 3채를 더 앉혔다. 기둥의 옻칠을 벗겨내고 옥으로 만든 섬돌의 이끼를 손으로 하나 하나 닦아냈다. “보통은 주인이 집을 고르지만, 영혼이 있는 집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그 날 이 집이 존재하고 싶어서 집이 커서 지붕 가운데가 휘었는데도 그리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지난 6일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4가 도심에 자리한 고택을 소개하던 오옥순 대표가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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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 상량문엔 ‘단군 기원 후 70회 경신 3월27일’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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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은 집·나무·맛·소리·놀이 등 다섯가지 멋을 지닌 공간이다. 오가헌 상량문엔 ‘단군 기원 후 70회 경신 3월27일’이라고 적혀 있다. 단기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860년에 완공한 집이라는 뜻이다. 옛 주인들의 행적도 흥미롭다. 옛 주인이었던 최원택은 일제시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에 나섰던 인사였다. 1906년 광주농공은행과 1917년 광주에 처음 전기를 공급했던 광주전기주식회사 등의 설립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최원택의 아들 최남주는 광산 사업가로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937년 경성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영화사는 1939년 이광수 소설 <무정>을 같은 이름의 영화(감독 박기채)로 제작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문예봉·한은진 등 당시 영화배우들이 광주에 올 때면 최남주의 집에서 머무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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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고택 오가헌의 옛 주인 최남주가 설립한 조선영화주식회사가 1939년 제작한 영화 <무정>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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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엔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였던 손기정 선수가 최남주의 집을 방문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최남주는 손기정 선수의 쾌거 이후 조선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해 거액의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1939년 서울에서 ‘학예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카프 계열의 작가였던 소설가 임화에게 운영을 맡겼다. <조선민요집>, <조선연극사>, <조선소설사> 등이 나왔다.
고향 광주 고택 1년 걸려 매입
주변 땅 사서 한옥 3채 더 앉혀
집·나무·맛·소리·놀이 ‘멋’에 오가헌
옛 주인 최원택 광주에 전기 첫 공급
아들 최남주 일제 때 영화 ‘무정’ 제작
9일 루트머지 ‘한 여름밤의 꿈’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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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 고택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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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은 수백년된 금강송을 깎아 내 가운데 남은 심재만 사용해 지은 단단한 고택이다. 창에 알루미늄 창호를 넣으면 한옥의 멋이 사라질까봐 창문을 사중으로 덧대 달았다. 연탄 보일러를 도시가스 온돌로 바꾸면서도 전통의 틀에 현대적 감성을 접목한 ‘팔만대장경 공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오 대표는 “자갈과 황토, 소금·숯을 깔고 흙을 체로 쳐서 밀가루처럼 만들어 우뭇가사리로 만든 한천과 버무른 뒤 종이로 방 바닥을 발랐다”고 말했다. 고택 안 은행나무와 금목서, 태산목 등 수백년된 나무 7~8그루도 세월을 웅변한다. 오 대표는 “3개의 가문, 7대가 이 집을 거쳐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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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엔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였던 손기정 선수가 최남주의 집을 방문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가운데가 손기정 선수이고, 오른쪽이 최남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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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7대 주인이 된 오 대표는 오가헌을 전통문화공간으로 변신시켰다. 9일 저녁 8시30분 오가헌에서 월드뮤직그룹 루트머지가 ‘한여름 밤의 꿈’ 공연을 펼친다.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마스터즈대회 기간 중 열리는 문화예술공연이다. 소리꾼 김산옥의 판소리 공연과 복합장르 음악극을 무대에 올린다. 오 대표는 이날 ‘오가헌 이야기’라는 주제로 공간 재생의 경험을 나눈다. 오 대표는 “90여 년 전 광주목의 청사에 걸려 있던 편액을 이모한테 받아 보관해오다가 오가헌에 걸기 위해 가져오던 날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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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이 폐허 상태에서 문화공간 겸 한옥호텔로 거듭나기까지 재생 과정을 담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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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은 편하게 쉴 수 있는 한옥 호텔이기도 하다. 본채와 별채에 묵을 수 있는 방의 수만 해도 7개나 된다. 바로 인근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어 도심의 전통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최근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때 고택을 방문했던 60여 명의 외국인들은 “환상적”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광주비엔날레나 아시아문화전당이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와 한-남아시아 문화장관회의 환영만찬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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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헌의 첫 주인 최원택은 1917년 광주에 광주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해 그해 9월 일반 가정에 전기를 공급했다. 사진은 광주전기주식회사 전경. 광주광역시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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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옥 4채의 넓은 공간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한 달에 딱 한팀만 숙박을 받고 있지만 운영비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하다. 그는 “오피스텔을 지으려는 업자들이 집을 팔라고 유혹하지만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유료 인문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오 대표는 “청년과 시민들이 전시회도 보고 커피도 마시면서 고택 안 편한 곳에 앉아 책을 읽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며 “우선 고택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문화해설사 한 명이라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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