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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9 10:14 수정 : 2019.08.09 10:16

[짬] 이탈리아에서 활약중인 박은선 조각가

조각가 박은선씨가 지난 7일 목포 삼학도에 설치된 ‘제1회 섬의 날’ 기념작품인 ‘무한기둥2’를 소개하고 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유달산이 보인다. 사진 김경애 기자
“이탈리아 유학 26년만에 고향 목포에서 대규모 전시를 하고, 신안 다도해의 자은도에 조각미술관도 짓게 됐으니 ‘금의환향’이라고들 반겨주네요. 그래서 부쩍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도 많이 받고 있어요, 나 자신을 믿고 당당하게 ‘조각의 한 길’을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기회가 왔다고 답하곤 합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조각가 박은선(54) 작가를 지난 7일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에서 만났다. 8~10일 ‘제1회 섬의 날 기념 대한민국 썸 페스티벌'이 열리는 인근 삼학도 행사장에는 그의 대리석 작품 9점이 이미 설치된 상태였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제작해 한달에 걸쳐 컨테이너로 실어온 것들이다. 특히 무게 44톤·높이 14미터짜리 거대한 조형물인 ‘무한기둥’은 멀리 유달산 봉우리와 선착장에 정박중인 배들과 어울려 웅장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세대', ‘연속성', ‘공유' 등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은 9일 개막식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목포에서 나고 자라 83년 경희대 입학
93년 대리석 주산지 카라라로 유학
2007년 야외조각 축제 통해 ‘명성’
유럽 미국 등에서 동시 전시 ‘분주’

신안군 자은도 ‘조각공원·미술관’ 협약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
9일 삼학도 ‘섬의 날’ 기념전 개막

‘무한기둥’ 설치작업중. 사진 박은선 조각가 제공
“섬의 날을 8월8일로 정한 이유가 ‘8’을 옆으로 봤을 때 ‘∽’(무한대)처럼 섬의 무한한 가치와 발전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해요. 그런데 마침 저의 대표 작품도 ‘무한기둥’ 시리즈이니 서로 뜻이 상통하거든요. 맨손으로 유학길에 오른 이래 낯선 이국땅이 저에겐 ‘섬’과 마찬가지였고, 온갖 욕망과 좌절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섬’처럼 고립시켜왔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만큼은 무한대였기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우연의 일치 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그의 첫 목포 전시가 이뤄진 과정은 마치 예정된 듯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1965년 목포에서 태어나 문태고를 졸업한 그는 경희대 사대 미술교육과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졸업 직전 같은 목포 출신이자 대학 동문인 이경희 화가와 결혼한 그는 93년 이탈리아 ‘카라라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그뒤 카라라 인근 피에트라산타에 정착해 지금껏 국외에서 주로 활동해왔다.

“그동안 국내 전시 때나 잠시 귀국해 부모님만 뵙고 돌아가곤 했기 때문에 목포에서 머문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지난해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맨다는 ‘급보’에 아이들도 데리고 들어왔어요. 다행히 아버님은 고비를 넘기셨고, 그때 며칠 여유가 생겨 지역 방송사와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어요. 그 방송을 보고 박유량 신안군수께서 직접 연락을 했어요.”

신안군은 추진중인 ‘1도(島) 1뮤지움' 아트프로젝트에 그의 참여를 제안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오롯이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잖아요? 저 역시 늘 마음 속에 그려온 나 만의 미술관이 있었죠. 무엇보다 미술관 입지와 설계 건축가를 제가 추천하는 조건이 맘에 들었어요.”

그는 작은 낙도이지만 최근 천사대교 개통으로 접근성이 편리해진 자은도를 골랐고, 평소 교유해온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를 직접 섭외해 그 자리에서 승락을 받아냈다. 스위스 출신인 마리오 보타(76)는 삼성미술관 리움과 강남 교보타워를 비롯해 국내 여러 성당을 지은 ‘친한파’ 건축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와 마리오 보타는 지난달 29일 신안군청에서 150억원 규모의 ‘인피니또(INFINITO·무한) 조각공원과 미술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앞으로 3년에 걸쳐 미술관이 세워지면, 그는 이번 목포시에서 주관한 ‘섬의 날’ 기념 행사에 소개한 작품들을 비롯해 대표작들을 상설 전시하는 한편, 다른 국내외 작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도 폭넓게 볼 수 있는 명소로 꾸밀 계획이다.

“당장은 귀향해서 미술관 운영을 전담하기는 어렵지만, 나라 밖에서 계속 열심히 활동해서 전 세계에서 ‘자은도 미술관’으로 제 작품을 보러 찾아오게 하고 싶어요. ‘진정성’은 어디서든 통하니까요.”

그의 이런 소신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학 입학할 무렵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중간중간 휴학과 군복무까지 마치고 10년만에 졸업을 할 수 있었죠. ‘노가다’, 서빙부터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안 살림까지 도왔어요. 그런 경험 덕분에 ‘나만 철저히 잘 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하지만 “오로지 질 좋은 대리석 주산지에서 맘껏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감행한 ‘카라라’ 유학은 돌이켜보면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단다. “임신 3개월된 아내와 도착한 첫날 묵을 곳도 없었어요. 한인 동포들 도움으로 겨우 화장실만 설치된 미준공 오피스텔을 빌릴 수 있었는데, 그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다시는 하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목포 전시와 동시에 진행중인 미국 휴스턴의 전시장에서 작품 설치 작업을 감독중인 박은선 조각가.
카라라 인근 세계적인 조각의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정착한 그는 유학 2년 만에 소규모 아트페어에서 첫 전시를 한 이래 10여년간 수많은 크고 작은 전시에 부지런히 출품을 했다. “2007년 피에트라산타 시에서 주관하는 대규모 야외 조각전인 ‘베르실리아나 축제’ 초대를 받았는데, 준비 기한이 겨우 4개월이어서 대가들도 줄줄이 포기했지만 평소 내공으로 무난히 해냈어요. 그때 실력만 갖추면 ‘행운’이 ‘기회’로 바뀌는 것을 실감했죠.”

‘베르실리아나 축제’ 초대는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였다. ‘색과 질감이 다른 화강암 조각의 대비와 반복, 여백의 미를 살려 조각에 동양적 미학을 접목시켰다’는 호평과 함께 그의 꾸준한 작업을 지켜본 ‘숨은 귀인’들도 속속 나타났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에서 전시 요청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유럽에서 100회 이상의 그룹전에 참여했고 60회 개인전을 열었다. 올해만 해도 이탈리아 2곳, 미국 휴스턴, 목포까지 4개의 전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2009년 선화랑에서 주는 ‘선미술상’을 받으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얻어 2015년 세계한인의 날에는 ‘국민훈장 석류장’도 받았다. 2016년에는 피렌체시 초청으로 공항과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전시하는 영광을 누렸고, 2018년 피에트라산타시에서 최고 조각가로 인정해주는 ‘제28회 프라텔리 로셀리상’을 받았다. 격년제 미술전시회인 ‘볼라레 아르테'의 2019 주인공으로 선정돼 토스카나의 관문 피사 국제공항과 피렌체 국제공항에 내리면 그의 대표작 6점이 반긴다.

“순수미술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조각 역시 후배들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요. 그렇지만 결코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앞으로도 묵묵히 제 길을 갈 겁니다.”

목포/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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