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4 22:21
수정 : 2019.08.14 22:35
[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문규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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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현 신부는 1989년 8월15일 목숨을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이래 지금까지 평화와 통일 운동의 맨앞줄을 지켜왔다. 사진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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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30년이나 흘러 ‘통일의 꽃’으로 불린 20대 초반 대학생이 50대 중년이 됐네요.”
‘판문점 군사분계선 민간인 첫 통과’ 30돌을 맞은 문규현(74) 신부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려고 이동중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문 신부는 1989년 8월15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한국외대 4학년)씨와 함께 남쪽으로 귀환했다. 두 사람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온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고 수감중 1992년 성탄절 전야에 형집행 정지로 가석방됐다.
1989년 8월15일 전대협 임수경씨 ‘보호’
‘민간인 첫 군사분계선 도보 통과’
정의구현사제단 ‘방북’ 결정에 따라
‘5·18망명객’ 고 윤한봉 뉴욕서 만나
“판문점 넘어 남북경계 허물자” 제안
기념회 ‘2020 국제평화대행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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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8월15일 오후 2시 22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요청으로 2차 방북한 문규현(오른쪽) 신부와 전대협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왼쪽) 학생이 판문점 북쪽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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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그때, 반세기 분단 시대의 금기를 깨는 충격적 사건은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임수경씨는 89년 6월21일 서울을 출발해 일본 도쿄와 독일을 거쳐 6월30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7월 1~8일)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은 이 대회의 성공을 위해 세계 각국의 청년 학생들을 초청했다. 20대 대학생의 첫 북한 방문은 남북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임씨의 무사 귀환을 위해 문 신부를 북쪽에 파견해 동행하도록 결정했다. 민주·통일운동을 탄압하는 공안정국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문 신부는 앞서 89년 6월6일 1차 방북해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미국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7월 25일 2차 방북에 앞서 ‘5·18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미국에서 망명중이던 고 합수 윤한봉(1948~2007)을 찾아갔다. 문 신부는 “윤 선생을 뉴욕의 한국청년연합(한청련) 사무실에서 만난 순간이 눈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한청련 회원들이 그 해 7월 미국인 11만명한테서 ‘한반도 반핵평화 기원 서명’을 받아 뉴욕 유엔본부 앞을 출발해 워싱턴 디시로 향한 직후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각본에 따라 5·18 주모자로 수배된 윤한봉은 1981년 4월 화물선을 타고 35일만에 미국으로 밀항해 국제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윤 선생을 만나 사제단의 요청으로 국제평화대행진단과 함께 하기로 했으니 도와달라 했지요. 윤 선생이 ‘연대해 줘서 고맙다’며 눈물로 뜨겁게 포옹하며 받아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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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밀항을 거쳐 미국 망명에 성공한 무렵의 윤한봉 선생. 그는 1989년 7월 북한에서 국제평화대행진을 기획해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도보 귀환’을 지원했다. 사진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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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상임이사도 이날 “군사분계선 도보 통과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기획자가 바로 윤한봉 선생이었다“고 말했다.
재미 한청련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도보로 걷는 기상천외한 구상을 추진중이었다. 한청련은 국제평화대행진 준비위원회를 꾸려 의장에 영국인 휴스테픈을 추대했다. 한청련은 7월20일 백두산을 출발해 정전협정 조인일인 7월27일 판문점에 도착해 국제평화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는 “한반도 분단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이 구상의 핵심은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남북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해 7월 20일 북한 삼지연에서 열린 국제평화대행진 발대식에는 한국전 참전 16개 나라를 포함해 30여 개 나라 400여 명이 참석했다. 국제평화대행진단 선두에 임수경씨가 섰다. 행진단은 백두산~사리원~개성 등지를 돌면서 “코리아는 하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라”는 구회를 외치며 행진했다. 2차 방북한 문 신부는 7월27일 판문점 대회에 합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유엔사 불허 등의 이유로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문 신부와 임씨 등 행진단 65명은 이튿날부터 판문점 북쪽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수차례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렸지만 협의하지 못하자 북쪽이 결단을 내렸어요. 그 결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북쪽의 표현을 빌리면, ‘사변적인 판문점 단식투쟁’으로 강제하였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8월15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군사분계선을 건너왔다. 문 신부는 “국제평화대행진 준비위원회와 전대협, 임수경씨가 서로 뜻이 합치돼 분단선을 통과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국제평화대행진 조직위원회가 주체적으로 실행한 국제대회였다”고 덧붙였다. 문 신부는 “분단의 금기를 깰 수 있었기에 은혜롭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지요. 그러나 또 다른 희망으로, 항상 처음 그 마음 잊지 않고 다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가야지요”라고 말했다.
윤한봉기념사업회는 올해와 내년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격동기를 맞아 ‘국제평화대행진’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황광우 상임이사는 “북-미 정상회담 결과가 한반도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평화와 통일의 진정한 주체인 국민들의 실천 활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2020년 5·18 민중항쟁 40돌 기념식에서 ‘제3차 국제평화대행진’ 발대식을 열 수 있도록 뜻을 모으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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