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철학자 이진경 교수, 가게모토 쓰요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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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집 번역자들은 지난 7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김 시인을 찾았다. 왼쪽부터 가게모토 쓰요시, 이진경, 김시종, 후지이 다케시, 심아정, 와다 요시히로. 와다는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심아정 박사는 일본 호세이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해 박사를 받았으며 지금 방송대 강사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는 시인의 오랜 팬이자 동네 주민 자격으로 참석했단다. 이진경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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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선생이 강력히 함께하자고 해 망설이다 참여했어요. 처음엔 번역할 생각이 없었어요.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으면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와 함께 재일동포 김시종 시인의 일본어 시집 <잃어버린 계절>(2010년)을 우리말로 옮긴 가게모토 쓰요시(연세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의 말이다. 창비에서 같은 이름으로 나온 이 시집은 일본인인 그가 먼저 번역하고 이 교수가 우리말 리듬에 맞춰 최종 교정을 봤다. 김 시인의 다른 시집 <이카이노 시집> <화석의 여름> <계기음상>도 이 교수와 다른 번역자(심아정, 와다 요시히로)의 공동 작업으로 내달 한꺼번에 나온다. 이로써 <지평선> <경계의 시> <광주시편> <니이가타> 등 기존 번역 시집까지 모두 8권의 김시종 시집이 독자와 만나게 된다.
이 교수는 최근 김 시인의 작품 세계를 철학자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파고들어 해명한 비평서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도서출판 b)도 냈다. 두 역자를 14일 전화로 각각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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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계절>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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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은 올해 만 90살이다. 1948년 제주 4·3항쟁에 남로당 조직책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공산당에 가입해 재일 조선인 민족운동을 하다 1960년대 중반 북 정권에 우호적인 조선총련과 결별했다. 김일성 주석의 자주적 유일사상을 주창하도록 한 조선총련의 방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큰 이유였다. 시인은 1950년대부터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또 일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재일을 산다’, ‘재일의 틈새’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시는 일본어로 1950년 무렵부터 썼다. “김 시인은 일본의 중요한 현대시인입니다. 일본 시단은 의도적으로 김 시인의 시를 무시했어요. 그러다 <이카이노 시집>(1978년)과 <광주시편>(1983년)이 나온 뒤에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죠. 도쿄에서 나오는 신문이나 잡지에 김 시인의 글이 자주 실려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이죠. 김 시인 작품의 특성은 확실히 사회성이죠.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보려고 해요. 심지어 벌레나 식물까지도요. 요즘 일본의 현대 시단은 말장난이거나 사상성 없는 시들이 대부분이죠.”(가게모토) “일본의 현대 시집은 5백부도 안 나가는 게 많지만 김 시인 시집은 최소 4~5천부는 팔린다고 해요.”(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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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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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공부해온 이 교수이지만 문학 작품 번역은 처음이다. 왜 시집 번역을? “(김 시인은) 일본에서는 유명한 시인인데 한국에서는 잘 몰라요. 무엇보다 제가 읽고 싶은 마음이 컸죠. 함께 번역한 일본 친구들과 김시종 시를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시를 번역하면서 자신의 언어감각마저 달라졌다며 우리말로 시를 옮기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고 했다. “번역에 2년 반 정도 걸렸어요. 계속 다듬고 다듬었어요. 재작년 여름에 초벌 번역한 시를 김 시인에게 보여드렸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이번에 최종 번역본을 보고는 잘 된 번역이라고 좋아하셨어요. 제가 낸 비평서도 철학적 관점에서 썼다며 일본어 번역을 권하셨죠. 가게모토가 번역하기로 했어요.” 2010년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한 카게모토는 이 교수의 책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2011)도 일본어로 옮겼다.
시인 김시종은 어떻게 철학자 이진경의 마음을 끌어당겼을까? “김시종의 시는 자신의 삶이 만들어낸 시입니다. 그러면서도 삶을 직접 드러내지 않죠. 시적인 언어로 변형합니다. 읽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시를 읽으면 강하게 밀려오는 실감이 있어요. 확 파고드는 실감이 강해요.” 김시종 시 중 가장 좋아하는 ‘화석의 여름’(<경계의 시> 중)을 떠올렸다. “시인은 돌이 된 시커먼 체념 속에 꽃잎 한 장을 박아 놓아요. 그 돌에도 바람이 스치어 오랜 침묵을 한 방울 목소리로 바꾼다고 노래합니다. 화석의 시간이 지나 누가 들어줄까 싶은 그 소망의 아득하고 아련함에 제가 빠져들어 결국 번역에 책까지 썼죠.”
그는 400쪽이 넘는 김시종 문학 비평서에서 김시종의 삶과 작품을 물샐틈 없이 교직해 김시종의 존재론을 추출한다. 왜 ‘어긋남의 존재론’인가? “김 시인의 시집 <광주시편> 등을 읽으면서 어긋남이나 존재론적 어긋남이란 말이 제 시야를 맴돌았어요. 존재자의 삶을 바꾸어 놓으면서 다른 삶으로 가는 출구를 여는 어둠, 그 심연이 김시종의 삶에서 보였죠. 존재론의 장소는 빛이 드는 숲속이나 세계가 아니라 그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다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왔어요. 김 시인은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그렇다고 그 어디와도 무관하지 않은 곳을, 그가 ‘재일의 틈새’라고 명명한 곳을 살았죠.”
그에게 김시종은 탁월한 시인뿐 아니라 심오하고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에 눈을 돌리기 위해 어둠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존재의 빛을 찾아갑니다. 지평 안에서 존재를 찾아요. 김시종은 지평선 바깥의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주목합니다. 거기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애쓰죠. 경계를 계속 넘는 삶입니다. 지평 바깥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계속 바뀝니다.”
‘구순’ 재일동포 김 시인 일본어 시집
‘잃어버린 계절’ 첫 공동번역 출간
이 교수가 먼저 가게모토에게 제안
다른 시집 3권도 조만간 나올 예정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비평서도
“김 시인 권유로 비평서 일본어 번역도”
그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다면서 김 시인이야말로 탁월한 개념 창조자라고 추켜 세웠다. “김 시인이 1950년대에 말한 ‘재일을 산다’나 ‘재일의 틈새’는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개념입니다.” 가게모토는 자신이 문학 연구자의 길을 가기로 한 데는 김 시인의 ‘시를 산다’는 사상이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누구나 시를 살고 있고 시인은 그것을 시로 표현할 뿐이라는 사상이죠.”(가게모토)
이 교수는 김시종 문학의 진가가 이 땅에 널리 알려지기를 강하게 열망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시인의 통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재일의 삶은 일본에 살지만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이죠. 어둠 속의 삶이죠.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힘든 삶이죠.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틈새의 삶이죠. 여기 이주민이나 소수자의 삶도 그래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도요. 이런 사람들의 삶을 사유하는 데 김 시인은 유용한 통찰을 줍니다. 김 시인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조건에 가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다른 틈새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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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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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모토가 가장 좋아하는 김시종 시는 1970년에 나온 세번째 시집 <니이가타>이다. “조선총련 조직이나 김 시인의 사상 사건 등 모든 문제가 나와요. 조직에서 버림받아 출구없는 상황에 처했음에도 출구를 찾아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지렁이나 거머리 같은 벌레가 되어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이런 시가 50년대에 나왔다는 게 놀라워요.” 덧붙였다. “김 시인은 늘 상호적으로 생각해요. 사회문제를 비판하면서 늘 비판하는 자신도 비판합니다. 비판당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나쁜 사람이고 비판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둘의 관계를 고정시켜 내가 오롯이 올바른 사람이 되면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어려워지죠.”
이 교수는 자신의 김시종 비평서를 일본어로 빨리 내고 싶어했다. “일본에서 김시종을 읽는 방식과 다른, 한국에서의 읽는 방식을 일본 안에 밀어넣고 싶어요.” 가게모토에게 왜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을 옮길 결심을 했는지 물었다. “일본에 김시종의 세계를 다른 식으로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죠. 일본 내 김시종론은 매우 다양합니다. 일본문학이나 재일조선인문학, 역사학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어요. 하지만 철학적 논의는 거의 없어요.”
문학은 철학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교수의 답이다. “철학적 사유는 명료하고 뚜렷한 것을 찾아요. 진리를 보고 싶어하죠. 이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인식(recognition)이라고 하죠. 반면 문학은 방금 피어난 꽃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고, 환한 빛 속에서도 어둠을 보려 하죠. 자명한 것들 속에 숨은 불확실성을 포착합니다. 철학보다 더 존재론적 사유에 가깝다고 보는 이유죠. 문학은 철학이 생각하지도 못한 근본적인 사고로 이끄는 힘이 있어요.”
또 다른 ‘김시종 탐구’ 계획은? “내달 시집 3권이 마저 나온 뒤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김시종 토론회를 합니다. 김 시인 시집 중 <일본풍토기>와 조선총련이 해판한 <일본풍토기 2>, 최근 나온 <등(背)의 지도>가 아직 번역이 안 됐습니다. 이 시집들도 누군가 번역하는 분이 없다면 제가 직접 번역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이진경)
마지막으로 최근 한일갈등과 그 해법에 대해 물었다. “쉽게 해결책을 찾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가야 합니다. 쉽게 해결하면 대기업이야 좋겠지만 저같은 사람에게는 좋을 게 없어요.”(가게모토) “손해를 보더라도 씻을 것은 씻고 가야죠. 문재인 대통령이 대응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이진경)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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