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9.03 19:31 수정 : 2019.09.03 20:05

[짬] 정보공개센터 활동가 김예찬 · 김조은씨

‘외환위기 아카이브’를 함께 만든 정보공개센터 활동가 김예찬(왼쪽)·김조은(오른쪽)씨 역시 1997년 외환위기를 기억하는 ‘아이엠에프 트라우마 세대’이다. 사진 정환봉 기자

정보공개센터 활동가 김예찬(33)씨에게 흔히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불리는 1997년 외환위기의 기억은 ‘전학’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다. 그때 11살이던 예찬씨는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갑자기 하나 둘씩 전학을 가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도 저처럼 다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전학을 가는 거예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들이 다들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를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난 거였어요.”

예찬씨와 함께 활동하는 김조은(27)씨에게 아이엠에프는 “달걀이 잘 팔리던 시절”로 각인되어 있다. 그때 7살이던 조은씨의 아버지는 서울 영등포시장에서 달걀을 팔았다. 경기는 침체했는데, 의외로 조은씨 아버지 가게는 작은 호황을 누렸다. “달걀이 가장 싼 완전식품이잖아요. 그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하나의 신호였던 것 같아요.”

2년 모은 ‘외환위기 아카이브’ 공개
국가기록원·지주형 교수 등 5천건
“2030세대 트라우마 비해 기록 빈약”

구조조정·정리해고·파산·이사…
“금모으던 시민들 조연 아닌 당사자”
저마다 겪은 이야기도 계속 수집중

1997년 외환위기가 가져온 후폭풍은 전 세대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갑자기 가정 경제가 기울거나 취업 길이 막혔던 20~40대들에게 아이엠에프 사태는 ‘1987년 민주화운동’보다 더 직접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을 제대로 정리해 둔 곳은 찾기 어렵다. 아이엠에프 사태에 대한 기록은 고위 경제관료의 회고록 속에서 환란을 극복한 무용담 정도로만 남아있는 게 대부분이다. 시민단체 ‘정보공개센터’가 잊히거나 왜곡된 아이엠에프 사태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관련 자료 5000여건을 수집해 지난달 30일 ‘외환위기 아카이브’(97imf.kr)에 공개한 까닭이다.

두 활동가뿐만 아니다. 저마다 그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정보공개센터 활동가들은 지난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시나리오를 쓴 엄성민 작가를 만났다. 임 작가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톺아낸 건 키워드는 ‘놀이터 유기견’이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집이 망해서 이사하는 사람이 많으니 놀이터에 유기견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금융회사에 다녔던 한 부장님은 구조조정할 사람을 2명 골라오라고 해서 직원들 면담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아이엠에프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지만, 그런 시민들의 기억들은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죠.” 조은씨의 말이다.

“아이엠에프의 역사에서 시민들은 ‘금모으기 운동’ 등의 조연으로만 등장합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경제관료나 정치인의 활약으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는 식의 기억해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 숱한 고통을 감당한 것은 정작 수많은 노동자인데 그들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찬씨가 지적했다.

정보공개센터는 아이엠에프 사태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료 수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2년 전부터 각종 기록을 모아왔다. 우선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를 해 500여건의 기록을 수집했다. 또 외환위기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에게 3000여건의 기록을 기증받았다. 이렇게 모은 자료 5000여건을 온라인 아카이브에 정리해 실었다.

1997년 11월16일 아이엠에프 총재 미셸 캉드쉬가 한국에 비밀리에 입국해 나눈 이야기를 재정경제원 관료가 정리한 수첩의 사본부터 국내 경제 상황을 분석한 각종 자료까지 수많은 기록이 수록됐다.

기록을 모으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조은씨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록이 없었다. 특히 정부가 구제금융을 선택하는 과정과 관련한 문서들은 당시 국회 국정감사 속기록 등에 문건 제목 등으로는 남아있는데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확인조차 어려웠다”며 “2년 동안 작업을 하면서 외환위기 자체가 많이 왜곡되고 망각됐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정보공개센터는 아이엠에프와 관련한 추가 자료도 수집해 아카이브를 앞으로도 계속 채워나갈 계획이다. 특히 외환위기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또 극복의 주춧돌이 된 시민들의 이야기를 전자우편(97imf@opengirok.or.kr) 등을 통해 모을 생각이다.

“아이엠에프와 관련한 시민들의 수기나 개인 소장 기록도 기증받을 계획이에요. 그리고 자료들도 추가로 수집해 아카이브가 그 시절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허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사실 청년들에게는 ‘1987년’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 ‘1997년’이거든요. 이번 아카이브가 그 시기를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은씨가 기록을 아카이브하는 이유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