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19 21:14
수정 : 2015.11.1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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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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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톡톡
<육룡이 나르샤>(에스비에스)는 독창적인 인물들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길태미(박혁권)는 한 번도 재현된 적이 없는 캐릭터이다. 그는 성리학이 지배이념이 되기 전의 즉물적인 욕망을 지닌 귀족을 재현한다. 경박하고 화려하고 유미적이며, 욕망에 솔직하다. 최고 검객인 그는 마치 오늘날의 스포츠 스타를 연상시킨다. 무예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귀족 생활을 향유하며,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그는 가치판단에 아무런 고민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래서 악역이지만 친근하다. 하지만 그가 조선 개국을 그린 드라마에서 조선시대와는 다르게 상상되는 고려시대의 심상을 압축한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즉, 드라마는 사대부와 다른 고려 귀족과 무신정권의 퇴행성을 길태미를 통해 보여주며, 조선 건국이 단지 왕조가 아닌 지배이념을 바꾸는 문제였음을 설득해낸다.
홍인방(전노민)도 만만치 않다. 그는 ‘변절자’라는 주체가 얼마나 무섭고 병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개혁적 사대부였던 그는 권력의 공포를 맛보고 가장 끔찍하게 돌아선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뒤집어 활용한다. 고려의 주인은 백성이요, 백성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민본주의 사상을 “백성들에게 더 세금을 부과해도 된다”는 근거로 써먹는 장면은 변절자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권문세족보다 더 악랄한 권력자가 된 그의 내면에는 분열이 존재한다. 가치의 전도와 변절자란 자의식은 스스로를 광기와 파멸로 밀어붙일 것이다.
드라마는 매력적인 악역의 맞은편에 건국의 주체들을 배치한다. ‘육룡’이 모두 흥미롭지만, 가장 중심 인물은 이방원(유아인)이다. 드라마는 ‘이방원의 성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년 이방원은 아버지를 ‘최강의 사내’로 믿었다가 실망하고, 정도전의 기개에 반해 성균관 유생이 된다. 그러나 홍인방에게 자아를 시험당하고, 선악과 정의의 가치 앞에서 방황한다. 우연히 정도전의 혁명론을 엿본 그는 “전쟁도 정복도 아닌 혁명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한다. 그는 혁명에 대한 조급증으로 무리수를 둔다. 일단 아버지를 끌어들이고 설득하겠다는 그의 뜻은 무산되지만, 혹독한 옥고를 치름으로써 그는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고,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추동해 낸다. 처음 이방원은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계급적 한계를 지닌 인물이었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던 전략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초인 분이와 만나고, 자신이 희생자의 위치에 놓이는 경험을 하면서 사고의 폭이 깊어진다.
드라마 속 이방원과 이성계의 관계는 흥미롭다. 건국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를 본 이방원이 후계구도에서 밀리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함흥으로 간 이성계는 끝끝내 화해를 거부했다는 사연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적극적으로 해석되지 못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사태를 재구성함으로써 그럼직한 해석을 내놓는다. 이방원은 아버지보다 한발 먼저 혁명에 나섰고, 아버지를 추동해냈지만, 혁명의 노선과 속도에서 척을 지게 된 것이다. 둘은 처음부터 속도차를 보이며 삐걱거렸던 혁명의 파트너인 셈이다. 이러한 관계는 여느 드라마의 부자관계와 다르다. 이방원은 아버지에게 종속되거나 반항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상대화하고 활용하는 주체다. 요컨대 이방원은 같은 유아인이 연기한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나 <사도>의 사도세자와 전혀 다른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황을 통해 옳고 그름을 찾아나갔으며, 스스로 찾은 길에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가장 잘 아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견인한다. 그리고 노선이 어긋나자 아버지를 패퇴시킨다.
영화 <암살>과 <협녀>가 보여주듯이, 나쁜 아버지는 죽여야 한다. <사도>가 보여주듯이 아버지에게 압살당해선 안 된다.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처럼, 아버지를 견인하고 활용하고 넘어서는 똑똑한 자식이 되어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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