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03 19:16
수정 : 2015.12.0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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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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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톡톡
<응답하라 1988>(티브이엔)의 인기가 전편을 뛰어넘었다. 주시청층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를 재현하여 공감이 덜하리란 예상은 기우였다. 30~40대 시청자들은 어렸을 때 보았던 잔상을 떠올리고, 그보다 젊은 층은 정겨움과 아련함으로 동질감에 빠져든다. 드라마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힘을 지니는데, 그것은 특정 시대를 재현해서가 아니라 가족, 이웃, 우정, 첫사랑 등 보편적 정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전편에 비해, 가족과 이웃을 강조한다. 첫 회부터 이웃 간에 찬을 주고받는 풍경으로 출발한다. 물론 이것은 허구이다. 이웃 간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챙기는 모습은 다 같이 빈궁했던 1970년대 달동네(이를테면 드라마 <달동네>)거나 생활공동체의 성격을 띠는 1980년대 농촌(이를테면 드라마 <전원일기>)이라면 모를까, 1988년 서울 주택가의 모습은 아니다. 드라마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허심탄회한 교류를 하며, 무모순적인 이웃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시공간이라기보다 ‘어디에도 없었던’ 유토피아의 속성을 지닌다. 즉 현재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제시된 이상화된 도시생활인 셈이다.
드라마는 이웃 간의 연대가 사라지고 어려울 때 기댈 데가 없어진 2015년 한국 사회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로 ‘1988년 쌍문동’이란 판타지적 시공간을 제시한다. 1988년 서울을 이상화된 시공간으로 삼다니, 언뜻 납득되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하지만 정이 넘쳤던 시절’이란 이미지를 덧씌운대도, 그 시절이 아름답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1988년 서울을 이상화된 시공간으로 돌아보는 기획은 성인으로 그때를 살았던 이들이 아니라, 청소년이나 어린이로 살았던 이들의 시선을 반영한다. 주인공들이 고교생인 것도 당시 청소년들이 누렸던 여유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1980년대는 정치적 억압이 상존했지만, 고교평준화, 교복자율화, 과외 금지 등으로 청소년들에겐 상당한 자유와 평등이 주어졌다. 빈민이나 빈농의 자식이 명문대에 입학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진학한 학생들은 부모와 독립된 정신세계를 구축하였고, 개인의 결단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곤 했다.
성보라(류혜영)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반지하에 살면서 서울대 장학생이 된 수재다. 하지만 동생을 잡도리하는 “미친년”이자, 어른들도 무서워할 만큼 성격이 사납다. 그는 담배를 피우거나 뜬금없이 운동가요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쳐서 가족과 이웃을 놀라게 한다. 그가 ‘민정당사 점거’라는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을 때, 어머니는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닙니다”라 울먹이며,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수재인지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어폐가 있다. 박종철도, 이한열도 자랑스러운 수재이자 운동권이었을 테니까. 성보라는 갈등하다가 모성에 굴복하고 자술서를 쓰고 훈방된다. 드라마는 학생운동에 발 디뎠다 도망친 인물을 그리면서, 그의 내면이 아니라 가족의 입장에서 묘사한다. 아버지는 학생운동 자체에는 동조적이나, 딸이 하는 건 극구 말린다. 드라마는 공적 가치의 문제를 가족 갈등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가족애로 봉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선 딸을 부모가 가족애로 붙잡는 것을 드라마가 뭉클하게 그린다. 하지만 그게 사태의 본질일까. 또한 드라마는 과외가 불법이던 시절, 엄마들이 모성과 연대감으로 과외를 시키고, 현직교사도 과외를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이를 나중에 펼쳐질 끔찍한 사교육 열풍과 달리 정겹게 묘사하지만, 이는 얼마나 다른 욕망일까.
‘이토록 가족애와 이웃의 정이 넘치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나?’라고 묻는다.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사회가 아닌 내 가족을 우선시하는 그 마음이 신자유주의 광풍과 만났을 때, 오로지 내 가족만 챙기다가 내 가족조차 챙길 수 없는 사회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던가. ‘1988년 쌍문동’의 온기를 사라지게 한 것은 바로 온기 속에 있던 가족과 개인을 중심에 둔 사고다. 이제 ‘사회적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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