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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3 14:52 수정 : 2016.09.23 20:19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임진왜란 1592>는 <한국방송>과 중국 <시시티브이>(CCTV)가 합작한 5부작 드라마로, 기존 사극보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팩추얼 드라마’를 표방한다. 9월3일부터 방송되었던 1~3편이 호평을 거두면서 추석연휴 동안 재방송되었다. 프라임 시간대의 재방송은 이례적인 편성이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화제를 이어갔다. 임진왜란은 그동안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 <명량>등을 통해 익히 보았던 소재이다. 그럼에도 반응이 뜨거웠던 건 어떤 이유일까.

첫째는 드라마의 만듦새이다. 영화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전투장면은 13억 원의 제작비가 안 믿길 정도이다. 둘째는 사료에 충실하다는 점이 오히려 재미의 요소로 작용했다. 허구가 많이 가미된 사극보다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해낸 사극에 의해 정확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에 부합하였다. 셋째는 임진왜란을 ‘민족의 환난’으로 보는 민족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16세기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 보는 국제사적 관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임진왜란은 명, 조선, 일본이 전면전을 치른 국제전이자, 동아시아 질서의 판도를 뒤흔든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드라마는 1~2부를 통해 이순신의 해전을 조명하고, 3부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정세를 조명했다. 4부는 명나라 출병과 평양성 전투를 그렸고, 5부는 조·명 연합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격퇴한 노량해전을 그린다. 이순신의 재현이 많지만, 당시 일본과 명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다룸으로써 임진왜란을 보는 시야를 넓혔다. 이는 한·중 합작의 장점을 살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획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시각도 있다.

9월18일치 <동아일보>에는 “중국 시진핑의 조공국으로 살건가”란 제목의 김순덕 칼럼이 실렸다. 칼럼에는 <임진왜란 1592>가 2년 전 방한한 시진핑이 “임진왜란 때 양국 백성과 군인들이 일본에 맞서 싸웠음”을 언급한 데서 유래된 것이며, 첫 방송일인 9월3일이 중국의 (항일)전승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 기획은 한류 드라마를 통해 쌓아온 콘텐츠 교류의 산물이며, 방송의 날 특집으로 9월3일에 첫 방송되었고, 정작 중국에선 장정 승리 80주년을 맞아 10월 말에 방송될 예정이다.

김순덕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김한솔 피디의 말에 개탄하며, 드라마로 인해 사드 배치나 한-미-일 삼각공조에 대한 반감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한다. 나아가 친중으로 치우친 정서를 바로잡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과 공조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통일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환영할 나라는 중국이 아닌 일본이라고 역설한다. 드라마 하나에서 엄청난 현실정치의 맥락을 뽑아내는 결기가 놀랍지만, 최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롯한 한일 군사동맹 강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의 일환으로 읽힌다.

말이 나왔으니 짚어보자. 지금 임진왜란을 조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은 뭘까. 당시 일본은 상당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강대국으로 부상 중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명을 치러 가니 길을 내라며 침략했다. 전쟁 전 조선은 율곡의 상소처럼 “나라가 나라가 아닌” 상태였다. 자주국방의 의지가 없던 조선은 개전 후 파죽지세로 밀렸다. 의주까지 도망친 선조는 명으로 귀화할 참이었다. 조선보다 앞서 일본의 의도를 간파했던 명은 전쟁이 제 나라로 번지는 걸 차단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일본과 맞섰지만, 육지에서는 명과 일본이 맞섰다. 조선은 작전지휘권이 없었다. 명은 전투를 하기보다 협상에 돌입했다. 조선을 배제한 채 진행된 강화협상에서 조선분할론이 논의되었다. 대동강 혹은 한강 이남의 땅을 일본에 넘기고 북부만 조선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을 국방의 울타리로 삼으려했던 명에게 조선 백성의 삶은 안중에 없었다. 조선 백성은 일본군과 명군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당했다. 왕권의 보전에만 관심 있던 선조는 백성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명군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 조선에 직접 관료를 파견하여 통치하겠다는 명의 계획에 선조는 오히려 반겼다. 전쟁을 계기로 군정과 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류성룡의 자강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후 명을 숭배하는 세력이 득세했다.

그 후 300년 만에 한반도에서 중국과 일본이 맞붙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조선은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협상과정에서 한반도 분할이 결정되었다.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군에 의존해왔던 집권자들이 이제 사드를 들여옴으로써, 한국은 대중국 방어의 총알받이가 될 판이다. 임진왜란의 진정한 교훈은 친중이냐 친일이냐가 아니라, 강대국들 사이의 샌드위치가 되지 말라는 게 아닐까. ‘징비’(懲毖)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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