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1.18 15:10
수정 : 2016.11.21 13:58
티브이는 온통 박근혜 헌정방송 중이다. 24시간 속보로 특종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상파, 종편, 케이블 채널의 보도 프로그램뿐이 아니다. 한동안 찾기 힘들던 정치풍자 코미디도 재갈이 풀리자 독한 풍자를 쏟아낸다. 권력형 비리의 끝판왕을 그린 정치스릴러이자, 출생의 비밀을 품은 막장 가족극이자, 격동의 시대를 담은 시대극이자, 가끔 큰 웃음을 터뜨려주는 코미디가 뒤섞인 초장르물이 티브이만 틀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때, 굳이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볼 사람이 있을까. 허구가 실제에 완벽히 무릎 꿇은 형국이다. 하지만 볼수록 기묘하다. 허구와 실제는 그저 평행하게 달리지 않는다. 앞서거나 뒤서면서 뒤섞인다. 허구는 예언자가 되거나 거울이 되어 동시대의 무의식을 비춘다.
올해의 영화로 꼽을 만한 <곡성>과 <아수라>를 보라. 지독한 리얼리스트였던 나홍진 감독의 역작 <곡성>은 주술의 세계를 담는다. 아니 웬 주술? 거기에 기독교와 한국 무속과 일본 신도가 얽혀 있다. 영화는 실체적인 악을 형상화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공동체의 절멸을 보여준다. 나홍진 감독이 박근혜 게이트를 알았을 리 없다. 그러나 <곡성>에는 지금 한국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이 예지몽처럼 들어 있다. 최태민의 영세교와 구국선교회는 기독교와 한국 무속과 일본 신도가 뒤섞인 것이다. 혼돈과 불신에 빠진 주인공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한다. 이 시국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곤경은 아닐까.
<아수라>는 개별적인 비리가 아니라,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민주주의의 실패를 보여준다. 모두가 악인인 세계에서 가장 악한 놈은 ‘민선시장’이다. 그의 권력은 ‘부자동네’를 꿈꾸는 ‘48만 시민들’에게서 온다. 탐욕에 찌든 자본가는 돈을 뜯기고, 출세욕에 찌든 검사는 결국 꼬리를 내린다. 이들은 서로 칼끝을 겨눈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출구 없는 파국이라는 세계관은 현실에 대한 지독한 비관을 담는다. ‘헬조선’은 답이 없기에 다 죽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급진적 정서를 공유한 이들에게 <아수라>는 정전이 되었다. 만약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126만명의 분노가 수렴되지 못한다면 그다음은 어찌 될까.
드라마 역시 예언자의 속성을 지닌다. <밀회>에는 최태민, 정유라, 차움 등 고유명사가 나오는가 하면, 재단 이사장의 투자분석가 딸을 부정입학시키고 성적을 조작하는 비리와 ‘호스트바’ 출신의 의류사업가가 등장한다. 정성주 작가가 알았을 리 없다. 그러나 최상층부의 위선과 천박함, 중간관리층의 비겁함을 농밀하게 그린 작품에서 실재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다.
뉴스에서 ‘길라임’을 들었을 때, 실소를 터뜨리지 않은 이가 있을까. 대통령이 민간병원에서 가명과 차명으로 진료를 받고 주사제를 대리처방 받아왔다는 사실은 국가원수의 신변이 무방비 상태였음을 말해준다. 국가원수가 혼수상태에 빠진 틈을 타 벌어진 음모를 그린 영화 <데이브> <광해>, 드라마 <웨스트 윙>도 있지 않던가. 하지만 ‘길라임’이라는 이름은 사태의 심각성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박근혜가 당시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는 사실은 누가 그 이름을 골랐는지와는 무관하게 기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드라마 속 길라임은 의로운 소방관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액션 대역배우로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에게 어느 날 재벌 3세 왕자님이 나타나는데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혼이 뒤바뀌는 기적에 의해 사랑에 빠진다. 알고 보니 그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구해준 소년이다. 길라임과 박근혜는 객관적으로는 전혀 연결점이 없어 보이지만, 주관적 서사의 관점을 따라가면 일치하는 점이 많다.
‘아버지의 딸’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60대 중반에도 여전히 ‘고아 코스프레’를 일삼는 박근혜는 자신을 ‘의로운 아버지를 잃고 꿋꿋이 살아가는 길라임’으로 인식했을 수 있다. 특히 대역배우와 비슷한 삶을 사는 그는 더욱 길라임에게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본래 박정희와 아는 사이였다는 최태민은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를 찾아와 육영수의 혼이 빙의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영적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은 세간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않으나, 영적인 교감에 의해 40년 이상 ‘대를 이어’ 굳건한 관계를 맺어온다. 혼이 뒤바뀜으로써 맺어진 길라임의 사랑! 박근혜의 일생을 지탱해온 사랑 역시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관계이자, 죽은 어머니가 보내주신 은혜로운 관계가 아니던가.
전 국민이 경악과 분노를 넘어 허탈과 조소에 빠진 사이, 박근혜는 대역배우의 삶을 계속해나가려 한다. 이미 허구의 세계와 구분이 불가능해진 박근혜와의 싸움에 골몰하며 지치지 말자. 지금 필요한 건 박근혜라는 허깨비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다. 그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게 아니라, ‘박근혜 퇴진시켜 친일청산’ ‘박근혜 퇴진시켜 기본소득’ ‘박근혜 퇴진시켜 여혐추방’ 등 구체적인 열망과 요구를 조직할 때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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