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17 15:11
수정 : 2017.03.17 21:29
[황진미의 TV톡톡] KBS2 <아버지가 이상해>
<아버지가 이상해>(한국방송2)는 전통적인 가족극을 표방하지만, 인물들을 통해 변화된 세태를 반영한다. 또한 제목이 암시하듯 아버지의 비밀을 미스터리의 요소로 삼는다.
분식점을 운영하는 변한수(김영철)와 나영실(김혜숙)은 1남3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모두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3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미혼인 네 자녀가 화장실도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아옹다옹 살아간다. 이 중 둘은 공시생과 취업준비생이다. 이들은 젊은 세대의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넷은 엉겨붙어 싸우다가 부모의 훈육을 받는다. 부모는 다 큰 자녀를 ‘생각의자’에 앉히고, 이내 화해하는 모습에 미소 짓는다.
하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자식들이 부모에게 용돈과 훈육을 받는 모습은 흐뭇하기보다 섬뜩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라, 사회문화적 조건이자 구성물이다. 이몽룡과 성춘향은 16살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렸지만, 지금의 16살은 무성적 존재임을 강요당하는 청소년이다. 전세대의 대학생은 ‘87혁명’의 주역이었지만, 지금의 대학생은 사회적 발언력이 없는 소외계층이다. 이를 반영하듯 청년비례대표의 연령도 19대 총선에서는 만 35살 이하였지만, 20대 총선에서는 만 39살 이하로 높아졌다. ‘미래의 주역’이란 이름으로 유예된 시기가 10대를 넘어 20대로, 이제는 30대로 확대된 형국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은 변혜영(이유리)이다. 그는 변호사로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지만, 계속 부모의 돌봄과 간섭을 받는다. 이유가 뭘까. 드라마는 그의 이기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희대의 악녀 캐릭터인 연민정을 연기한 이유리의 얼굴은 악녀의 이미지를 뿜는다. 그는 자기 물건을 동생과 나누지 않으며, 일체의 관용이나 양보가 없다. 연애에 있어서도 악녀의 포스를 풍긴다. 대학시절 연인이었던 차정환(류수영)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뒤, 호주로 떠나버렸다. 8년 만에 재회한 차정환은 이별의 이유라도 알자며 찾아오지만, 변혜영은 번번이 약을 올리거나 폭력을 쓰며 피한다. 안전이별과 스토킹이 ‘젠더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변혜영이 보이는 위악적인 태도는 이러한 논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계속 찾아오는 차정환과 티격태격하다 하룻밤을 보내게 된 변혜영은 놀랄 만큼 냉랭함을 유지한다. 그는 거울을 보고 “결혼할 거 아니잖아?”라고 반문하며,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변혜영은 보건사회연구원의 원종욱 연구위원이 주목한 ‘고학력·고소득 비혼여성’이다. 그가 비혼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변혜영은 “한국에서 며느리는 인도로 치면 카스트제도의 불가촉천민쯤 된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결혼이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변혜영이 차정환을 떠난 이유가 차정환의 어머니 때문임을 암시한다. 기센 ‘개룡녀(개천에서 난 용)’가 아니라, 집안 좋고 얌전한 며느리를 원하는 어머니는 앞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에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변혜영의 사례는 원종욱 연구위원의 발표와는 달리, 고학력·고소득 비혼여성의 눈높이를 낮추는 게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말해준다. 오히려 그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며느리가 불가촉천민이 되어버리는 가부장제의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한다. 드라마가 앞으로 어떤 해결책을 보여줄지 미지수이다. 변혜영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그는 변할 것이고, 장르의 특성상 로맨스는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드라마가 변혜영이라는 비혼여성을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주체로 그리기보다, 가족과 엉겨붙어 있으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알 수 없는 악녀로 그리다가 이성애의 세례를 통해 갑자기 이해심이 풍부해져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새로운 가족까지 포용하는 인물로 변모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드라마가 변혜영을 악녀처럼 그리는 것에서 고학력·고소득 비혼여성을 대상화하는 원종욱 연구위원의 시선이 잠시 느껴졌다면 과민한 것일까.
드라마의 긍정적인 요소도 꼽을 만하다. 변한수는 자녀에게 살가운 아버지이자,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이다. 그의 태도는 아내를 은근히 멸시하는 차규택(강석우)의 태도와 대비된다. 또한 변준영(민진웅)은 애인을 위해 요리하고, 여동생들을 위해 운전하는 남자이다. 공시생 5년차인 그는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보살핌 능력은 재평가 받아야 된다. 그가 공무원이 되는 게 아니라, 주부로 살림을 하거나 아버지처럼 식당을 하게 된다면 진정한 자아실현과 해피엔딩에 이를 것이다. 남성의 경제적 능력만을 중시하지 않고, 보살핌 능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성평등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임금과 동일한 승진기회를 주고, 남녀 모두에게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면, 남녀 모두가 노동자이자 양육자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사회라면 굳이 비혼 여성의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 ‘음모 수준의 콘텐츠’를 개발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출산률이 높아질 것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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