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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4 17:15 수정 : 2017.04.14 21:26

[황진미의 티브이톡톡]

<귓속말>(에스비에스)은 <추적자>(에스비에스, 2012년) <황금의 제국>(에스비에스, 2013년) <펀치>(에스비에스, 2014년)를 통해 정치권, 재벌, 검찰 등 지배세력의 환부를 적나라하게 해부해보인 박경수 작가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대형 로펌을 배경으로 사법부와 검찰의 뿌리 깊은 부패 구조를 고발해낸다. 박경수표 드라마답게 전개가 매우 빠르고,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적도 동지도 없이 싸운다. 드라마는 촛불 정국에서 폭로된 현실의 음영을 강하게 품는다.

방산비리를 추적해온 기자가 살해되고, 해직기자 신창호(강신일)가 후배를 죽인 누명을 쓰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신창호의 딸이자 형사인 신영주(이보영)는 사건의 배후에 대형로펌 태백이 있음을 알고, 양심적인 판사로 알려진 이동준(이상윤)을 찾아가 공정한 재판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동준도 태백의 덫에 걸려든다. 모든 것을 잃을 위기를 맞은 이동준은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고, 태백의 대표 최일환(김갑수)의 사위가 된다. 경찰에서 파면된 신영주는 이동준을 협박하여 태백에 위장취업을 한다. 감옥에서 폐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를 살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신영주의 분투가 시작된다.

드라마가 태백을 통해 보여주는 적폐의 얼개가 흥미롭다. 국내 최대 로펌인 태백은 사법부와 검찰에서 고관을 지낸 인사들을 흡수하여, 전관예우와 인맥을 통해 재판을 좌지우지한다. 태백은 재벌의 불법행위들을 세탁해주고, 인수합병이나 해외투자, 매각 등을 도운 대가로 엄청난 수임료를 얻는다. 법을 통해 대한민국 정·재계를 주무르는 태백은 방산업체 보국산업과 얽혀 있다. 30년 전 가난한 변호사였던 최일환에게 강 사장(김홍파)이 자금을 대고 태백을 만들었다. 신군부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강 사장은 1980년대 신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쥔 뒤 방산업체를 키워나갔다. 요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신군부 세력과 결탁된 자본을 한 축으로 하고, 법조 엘리트들을 한 축으로 삼아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한편 최 대표의 장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최 대표와 사돈이 된 이동준의 아버지(김창완)는 병원장이다. 병원장은 태백과의 혼맥을 이용해 청와대 주치의가 되고, 성형센터 건립을 비롯한 의료민영화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

이처럼 공고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인물이 일개 여성이다. 그는 뛰어난 개인기를 지닌다. 강한 체력과 호신술은 기본이고, 고급영어 작문에, 로펌 비서직을 훌륭하게 수행할 정도의 사무능력을 갖추었다. 더욱 출중한 것은 그의 의지이다. 그는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의지로 무슨 일이든 한다. 언제나 뚜렷한 목적 의식으로 냉철하게 움직일 뿐,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특히 연애나 성관계는 감정을 뛰어넘어, 부탁과 협박의 도구로 삼는다. 심한 감정의 동요를 겪는 건 오히려 그의 주변 남자들이다. 5년간 연인이었던 남자는 신영주와 데이트를 하고 신영주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연민, 죄의식, 사랑, 질투, 분노 등 온갖 감정에 휩싸인다.

신영주는 기존에 재현되지 않았던 여성상이다. 그는 능력과 의지의 측면에서 영웅에 가깝지만, 한편으로는 뜨악함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아버지의 사건을 부탁하던 신영주가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하겠다며 협박하자, 이동준은 “창녀”라며 경멸한다. 로펌에서 이동준과 경쟁 관계에 놓인 강정일(권율)은 신영주를 처음 보았을 때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였지만,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 협상 파트너로 여긴다. 신영주는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활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에게는 전사, 영웅, 창녀, 꽃뱀, 효녀, 미친년의 이미지가 있다. 이렇듯 신영주의 이미지는 균열되어 있지만, 뚜렷한 자기 확신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닌다. 그는 영웅적인 주체와 만만한 대상 사이를 능동적으로 오간다. 남성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진정으로 두려운 존재이다.

그런 신영주에 의해 이동준이 변한다. 이동준은 이런 장르물의 주인공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흔히 처음부터 정의로운 주인공(가령 <추적자>)이 등장하거나, 처음에는 정의롭지 않았지만 어떤 상황에 의해 점차 정의롭게 행동하는 주인공(가령 <펀치>)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동준은 처음에는 정의로운 판사였으나, 회유와 협박을 받으며 도덕의 시험대에 올라 패배한 자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비겁함을 마주하고 도덕적 자포자기에 빠진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움직이는 신영주를 통해 자신이 느낀 두려움과 비겁함을 투사해보며, 정체성과 정의감의 혼란을 딛고 윤리적 성장을 해나갈 예정이다.

이들이 공고한 지배 구조와 대결한다. 드라마는 지배 구조가 겉에서 보면 견고해 보이지만, 안에는 엄청난 균열과 갈등이 존재함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신영주와 이동준은 이 균열의 틈새를 파고들며, 지배 세력을 내파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그들의 싸움을 통해, 어떻게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지 현실의 지혜를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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