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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05 18:06 수정 : 2018.01.05 20:01

[토요판] 황진미의 TV 톡톡

<케이비에스 연기대상>에서 멋진 소감으로 화제를 모은 정려원. 프로그램 갈무리
해마다 연말이면 지상파 방송사들의 시상식이 열린다.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인데다 스타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큰 무대이지만, 언제부턴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계륵이 되어버렸다.

수상자 선정은 작품성이나 연기력보다 주로 시청률에 좌우된다. <청룡영화상>에서처럼 천우희나 진선규 같은 무명배우가 상을 받는 감동이 없는 것이다. 이는 시상식의 흥행을 위한 조치로 보인다. 시청률이 높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고루 상을 나눠 주면, 배우들의 출석률도 높아지고 시청률도 올라간다. 이왕이면 인기상에 해당되는 상도 여럿 만들고, 분야도 잘게 쪼개어 공동수상을 늘리면 수상자는 몇 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이런 ‘퍼주기’와 ‘나눠먹기’가 계속되다 보니 상의 권위가 점점 떨어진다. 더욱이 <티브이엔>(tvN)과 <제이티비시>(JTBC)가 지상파를 능가하는 작품들을 내놓음에 따라, 지상파 시상식의 가치는 더 하락했다. 2017년 최고의 드라마로 <비밀의 숲>(티브이엔)이나 <도깨비>(티브이엔)를 꼽는다 한들 반대할 이가 있겠는가.

예능 분야에서는 <에스비에스>(SBS)가 관심을 모았다. 파업으로 파행을 겪은 <한국방송>(KBS)은 아예 시상식을 열지 못했고, <문화방송>(MBC)은 <나 혼자 산다> 외에 경쟁작이 없었다. 반면 <에스비에스>는 잘된 예능프로그램이 많아서 누가 대상을 받을지 귀추가 주목됐다. 기사회생한 <런닝맨>의 유재석이냐, 시청률 20%를 넘긴 <미운 우리 새끼>의 신동엽이냐, 부상까지 입어가며 <정글의 법칙>을 지킨 김병만이냐 예상이 분분했지만, 정작 대상은 <미운 우리 새끼>의 네 어머님에게 돌아갔다. 연예대상을 일반인에게, 그것도 후보에도 없던 이들에게 상을 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2013년 인기가 높았던 <아빠! 어디 가?>(문화방송)의 아이들이 특별상을 받았던 것처럼 어머님들에게도 특별상이나 공로상을 드리거나, <무한도전>(문화방송)팀과 <1박2일>(한국방송2)팀이 수상했듯이 <미운 우리 새끼>팀 전체에 상을 주는 것이 더 맞지 않았을까.

이런 깜짝쇼는 감동보다 허탈감을 안기기 쉽다. 자칫 예능인들의 노력을 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예능인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능력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허탈하다. 이날 시상식에서 김숙·송은이는 라디오 디제이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박나래는 모바일아이콘상을 받았다. 김숙·송은이가 ‘일이 없어서’ 시작한 팟캐스트에서 대박을 터뜨리고 방송사로 재입성한 일이나, 박나래가 <엠비시 연예대상>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춘 예능인이면서도 <에스비에스>에서는 모바일 콘텐츠 채널에서 활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박나래는 이날 시상식의 스페셜 엠시(MC)로 화제의 분장쇼 ‘복붙쇼’를 선보였다. 왜 이런 웃긴 쇼를 그동안 티브이에서 볼 수 없었을까.

드라마 분야에서 <역적>의 김상중이 <엠비시 연기대상>을 받은 것이나, <피고인>의 지성이 <에스비에스 연기대상>을 받은 것은 이견이 없다. <에스비에스 연기대상>이 인기상에 해당되는 잡다한 상들을 없앤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방송>의 경우 베스트커플상을 6쌍에게 나눠 주고, 드라마를 분량별로 세분해 상을 주고, 공동수상도 많았다. ‘퍼주기’ 구태가 여전한 것이다. 해를 넘겨가며 무려 5시간에 걸쳐 방송된 시상식은 과유불급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 와중에 최우수상을 받은 정려원의 소감이 유독 돋보였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30대 여배우와 작업하는 것은 피곤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런 소회로 수상소감을 채웠어도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려원은 자신의 성취가 가장 빛나는 순간에, 자신이 아닌 사회를 위해 발언하였다. 자신이 작품을 하면서 알게 된 성범죄의 실상을 깊이 절감하고, 배우가 아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우리 사회에 성범죄가 감기처럼 만연해 있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이 성적 수치심 때문에 나서지 못한다”는 그의 고발은 한갓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우수연기상을 받고 ‘힘든 시기’와 ‘연기로 보답’을 운운한 박시후의 경우, 2013년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한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전력이 있다. 당시 피해자의 고소 취하로 ‘공소권 없음’의 처분을 받았지만, 이는 친고죄 규정이 폐지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기에 가능했다. 어디 박시후뿐이겠는가. 문화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에서 보듯이, 그 자리에도 ‘만연한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정려원의 발언에 대해 <에스비에스> 앵커였던 김성준이 ‘자연스럽지 못한 연기’ 운운하며 엉뚱한 트집을 잡은 것은 상징적이다. 흔히 여배우는 화려한 드레스로 레드카펫을 장식하는 ‘시상식의 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려원은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라는 선언에 걸맞게 행동하였고, 이것이 기존 시선에 익숙한 남성들의 심기를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드러낸 해프닝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에 합당한 기회와 인정을 받고, 꽃이 아닌 목소리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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