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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24 07:59 수정 : 2018.02.24 20:18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SBS ‘로맨스 패키지’

<로맨스 패키지>(에스비에스)는 설 연휴에 방송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특급호텔에서 진행된 짝짓기 관찰 예능이다. 시청률과 화제성이 높은데다, 10명의 남녀 중 3쌍이 맺어지는 높은 성적을 보여, 진행을 맡은 전현무는 3회 말미에 정규 편성의 기대감을 한껏 내비쳤다. 하지만 <로맨스 패키지>가 정규 편성되는 일은 부디 없길 바란다. 프로그램이 천민자본주의의 속물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다, <짝>이나 <하트 시그널>에 비해 무성의한 기획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패키지>는 ‘호텔에서 보내는 휴가’를 표방한다. 10명의 남녀가 3박4일 동안 각기 객실에 머물면서, 호텔 부대시설 등을 이용하며 원하는 상대와 만남을 이어간다. <짝>과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장소다. <짝>의 출연자들은 지방 펜션에서 일주일간 합숙하였다. 펜션과 호텔의 차이가 럭셔리함만은 아니다. 제작진은 모든 편의시설을 갖춘 호텔이야말로 연애의 최적 장소라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호텔은 이미 연인이 된 사람들이 사생활 보호를 받으며 쾌적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일 뿐, 공개 짝짓기 프로그램에 걸맞은 장소는 아니다. 출연자들이 각자 객실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현저히 줄어들고, 똑같은 객실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은 단조롭고 관음적이다. 원래 객실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 그곳에 놓인 출연자들을 보여주는 화면은 나른하고 변태적인 상상을 부추긴다. 가령 막 짐을 푼 첫날 저녁, 여성 출연자들은 맥주를 들고 첫인상이 마음에 드는 남성 출연자의 객실에 들어가라는 미션을 받는다. 로맨스 가이드란 이름의 전현무와 한혜진은 전체 객실이 조망되는 큰 모니터를 보면서, 객실 전화로 출연자들에게 지시한다. 그런데 이런 구도는 호텔방 불법카메라나 밀회, 혹은 성산업 등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짝>에서 동성 출연자들은 펜션의 넓은 방에서 부대끼면서 견제와 이합을 펼쳤다. 사회생물학이 연상되는 출연자들 간의 긴장과 고립된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다 보니 초조감과 변심에 시달리는 출연자들의 감정 변화도 재미의 요소였다. 제작진은 출연자들의 감정 변화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유려한 내레이션을 곁들임으로써, 인류학적 관찰을 표방하는 독특한 입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로맨스 패키지>는 이러한 재미를 탈각시킨다. 자기만의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출연자들의 피로감은 낮아졌지만, 화면은 극히 단조로워졌다. 출연자들의 선택을 확인하는 짧은 순간의 긴장이 반복될 뿐, 다양한 감정이 포착되지 않는다. 인류학적 관찰이라는 시치미를 담은 내레이션이 사라진 자리에, 호텔방 불법카메라가 연상되는 감시화면과 로맨스 가이드의 개입이 들어선다.

<하트 시그널>(채널에이)과 비교해도 만듦새가 한참 떨어진다. <하트 시그널>은 합숙이 아닌 동거를 표방하였다. 출연자들은 한달 동안 일과를 마친 후 평창동 주택으로 퇴근하여 함께 저녁을 해 먹고 주말 나들이를 즐겼다. 규칙이나 개입은 최소화한 상태에서, 많은 관찰카메라로 찍은 화면들을 편집하여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감흥을 안겼다. 사실 8명의 출연자들은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직업과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이질감이나 위화감은 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일상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한달간 동거하며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14주에 걸쳐 보다 보니 시청자들의 감정이 이입되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액자형 예능구조와 판정단의 역할이 주효했다. 윤종신, 김이나 등 연애심리에 해박한 판정단이 출연자들의 화면을 보고, 논평을 곁들이며 이들의 선택을 점쳤다. 판정단은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는 해설자 노릇을 했지만, 더 중요한 역할은 관음의 심적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얼굴, 실명, 직업, 나이 등을 모두 공개한 실제인물들이 진짜로 연애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죄의식을 동반한다. 하지만 대놓고 남의 연애를 구경하고 품평하는 판을 먼저 깔아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은 판정단에 눈을 맞춘 채 마음 편히 구경하고 품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맨스 패키지>는 이러한 형식상의 고민이나 감정의 완충장치를 두지 않는다. 제작진은 출연자들의 스펙과 미모를 가장 큰 콘텐츠이자 볼거리로 여기며, 이들을 호텔이라는 럭셔리한 공간에 부려놓기만 하면 시청자들이 선망할 만한 그림이 나올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소개 시간에 남성 출연자들의 학벌, 직업, 재산 등이 공개되고, 여성 출연자들의 미인대회 경력과 직업 등이 소개되었다. ‘남자의 경제력과 여자의 미모’를 강조하는 ‘구린’ 기획이다 보니,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수영장 물놀이를 하라는 미션이 주어지고, 주차된 남자들의 차를 보고 여자가 골라서 타라는 미션이 주어진다. 출연자들에게 ‘어차피 당신들의 관심사는 여자의 외모와 남자의 경제력을 빠르게 파악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듯한 낯 뜨거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화려한 면모의 출연자들은 시청자들 눈에 익을 새도 없이 며칠 만에 위화감만 남기고 사라졌다. 우린 대체 뭘 본 걸까.

‘호텔 대중화에 앞장선다’는 숨은(?) 기획의도만 돋보이는 천박하고 안일한 프로그램 앞에서, 이것 하나만 분명히 짚고 싶다. 우리는 모두 속물적인 욕망을 지니고 산다. 하지만 굳이 팬티를 내려가며 그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명심하자. 팬티는 위선이 아니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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