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24 05:01
수정 : 2018.03.24 18:50
황진미의 TV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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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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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티브이엔·tvN)는 이선균, 아이유 주연의 드라마로, 방송 전부터 논란이 많았다. 남녀 주인공의 나이 차가 심한데다, 제목에서 수상한 욕망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드라마가 공개되자, 논란은 공분으로 바뀌었다.
중년 남성과 20대 여성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신사의 품격>(2012)이나 <도깨비>(2016)도 있었으니까. 두 드라마는 나이 차를 별것 아니게 보이려고 남자에게 많은 매력을 부과했다. 미남은 기본이요, 엄청난 재력을 지녔거나, 심지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는 평범한 아저씨를 그린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둘의 관계를 거부감 없이 설득할 것인가. 드라마는 극악한 네거티브 전법을 구사한다.
첫째, 여성의 처지를 최악으로 그린다. 지안(아이유)은 가난과 빚에 시달린다. 사채업자 광일(장기용)은 지안을 쫓아다니며 폭행한다. 드라마가 구타 장면을 자세히 묘사한 것에 시청자들이 항의하자, 제작진은 단순한 채무관계가 아닌 얽히고설킨 관계라고 해명했다. 사실은 그게 더 문제이다. 두들겨 맞은 지안이 “너 나 좋아하지” 묻는다. 사채업자도 채무자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다.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사채업자는 여자의 빚을 조금씩 탕감해주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도움을 주며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광일은 애정과 집착을 폭력으로 드러낸다. 즉 데이트 폭력, 스토킹 같은 젠더 폭력의 극심한 형태인데, 더 문제는 이런 가학적 소통방식을 지안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묘사된 것이다. 젊은 남자의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지안을 그림으로써 평범한 아저씨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치졸한 설정이다.
둘째, 남자의 죄의식을 덜어준다. 아내인 윤희(이지아)는 변호사이고 불륜 중이다. 잘난 마누라로 인해 기가 죽어 있던 판에, 하필 내 후배이자 상사랑 바람을 피운다니, 남자로서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는 변명거리를 주는 것이다. 즉 이만하면 젊은 여자를 만나도 크게 나쁜 놈은 아니지 않으냐는 면피의 논리가 숨어 있다.
셋째, 중년 여성의 외모를 비하한다. 매력적인 윤희는 “젊었을 땐 중년 여자들이 그 나이와 그 얼굴로 무슨 사랑을 하나 싶었다”고 말하고, 지안은 윤희를 두고 “아줌마를 왜 사귀어요? 예쁜가? 예뻐 봤자 아줌마지”라 말한다. 여자의 입을 통해 중년 여성의 외모를 후려치는 것이다. 반면 “걔 예뻐? 하물며 어려?”라는 상훈(박호산)의 말은 젊은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시킨다. 하지만 남성의 나이와 외모에 관한 언급은 없다. 동훈을 “억울하게 생긴 자”로 기억하는 중역의 말이 전부이다. 요컨대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중년 남성의 나이와 외모는 별 변수가 되지 않으며, 중년 남성의 대표 격인 ‘나의 아저씨’는 ‘억울함’을 자기 표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드라마는 나름 솔직하다. 시청자들을 위해 드라마의 제작의도를 직접 설명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아저씨 삼형제가 ‘아저씨 호러’ 운운하는 장면을 보라. 형 상훈이 ‘아저씨 호러’의 시놉시스라며, 실직한 중년 남성이 홀로 죽어가는 광경을 묘사한다. 그러자 동훈은 “여자가 빠졌다”고 지적한다. 상훈은 “여자를 어디다 집어넣어?”라 궁싯거리지만, 장면이 전환되면서 고생하는 지안의 모습이 나온다. 즉 아저씨들의 짠한 현실을 위주로 한 드라마에 억지로 끼워 넣은 여자가 지안이란 자백이다.
상훈은 또 여자 없이 남자들끼리 사는 ‘아저씨 마을’을 언급한다. ‘아저씨 마을’은 그들의 현실이자 비틀린 욕망의 발현이다. 그들은 동성 사회적 남성공동체를 꿈꾸는데, 이미 여성을 배제한 채 형제들끼리 똘똘 뭉쳐 살고 있다. 상훈은 이혼했고, 동훈은 이혼 직전이며, 기훈은 미혼이다. 이들은 비밀이 없고, 허물이 없으며, 서로를 열심히 돕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저씨들만 사는 마을이 있다면 그곳은 아저씨들의 천국일까, 유배지일까. ‘아저씨 마을’에 대한 희구는 아저씨들이 사회에서 핍박받는 소수자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아저씨는 이 사회의 주류이며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아저씨 호러’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50대 남성의 고독사가 많다는 기사에 아저씨들에 대한 연민이 따라붙지만, 이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다른 이들의 돌봄 노동에 의존해 살아왔는지를 방증한다. 요컨대 아저씨들은 이미 다른 존재를 착취하는 성별계급의 기득권자들이면서, 자신을 소수자로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지곤 하는데, <나의 아저씨>가 이런 ‘피해자 코스프레’에 복무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사회적으로나 성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억울한’ 아저씨들의 속내를 투명하게 전시한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빠지면 안 된다’는 동훈의 요구에 따라,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의 삶을 피학적으로 소비한다. 그러고는 ‘나의 아저씨’란 제목을 통해 젊은 여성에게 친밀한 존재로 불리고픈 남성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참으로 민망한 아저씨들의 ‘자기모에화’(자기탐닉)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상기하자. ‘미투’ 운동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대다수가 ‘삶의 무게를 짊어진’ 중년 남자란 사실을. 이들 중 상당수는 그것이 성폭행인지도 모른 채, 사랑 운운했을 것이다. 심지어 <아빠를 부탁해>란 제목의 가족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5명의 연예인 아빠들 중 2명이 상습 성폭행 가해자였다. 이제 ‘당신들의 아저씨’ 그만 연민하고, 그만 위무하고, 그만 부탁하자. 그 대신 현실자각타임을 안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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