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1 17:32
수정 : 2019.11.02 02:31
[황진미의 TV 톡톡]
<유령을 잡아라>(티브이엔)는 ‘지하철 경찰대’(지경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제목의 유령은 중의적이다. 연쇄살인범을 가리키는 말이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장르도 복합적이다. 수사극에 로맨틱코미디의 설정을 섞었다. 복합장르야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드라마는 여기에 더 강한 향신료를 끼얹었다. ‘상극 콤비’ 남녀 캐릭터가 벌이는 좌충우돌 코미디가 예상 밖의 큰 웃음을 터뜨리며, 치밀한 추리보다 서민의 애환이 담긴 수사극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이건 마치 <수사반장>에서 느꼈던 휴머니즘이 아니던가!
주인공이 뿜어내는 인간미도 상당하다. 실종된 쌍둥이 동생을 찾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령(문근영)의 캐릭터는 다소 ‘올드’하고 문근영의 외모에 썩 어울리지 않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문근영의 성실함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전도유망한 엘리트 경찰이었던 고지석(김선호)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지경대에 자원한 사연이나, 생활고에 밀려 악성 대부업체를 찾는 모습은 짠내를 풍긴다. 절대 ‘오버’하지 않는 김선호의 연기가 고지석의 캐릭터를 더욱 매력 있게 한다.
남녀 캐릭터의 안배도 바람직하다. 특별한 사연을 지닌 열혈 경찰이 여성이고, 그를 차분하게 받쳐주는 선임이 남성이다. 여성 경찰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탄 남성 경찰의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는가. 이런 구도는 그동안 여성을 들러리로 소비해온 관습을 깨려는 시대적 요청의 반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찰청장도 여성이고, 광역수사대 엘리트 경찰 하마리(정유진)도 여성이다. 하마리가 경찰청장의 딸이자 고지석의 과거 연인이란 설정도 기존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부자지간과 연인관계의 젠더가 뒤집힌 구도다.
수많은 경찰 드라마가 있었지만, 지경대가 조명된 적은 없었다. 주인공은 주로 강력반 형사이거나 동네 순경이었다. 강력사건과 지역사회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경대는 소매치기, 성추행, 주취폭력 등 ‘잡범’들을 상대할 뿐 강력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하철은 빠르게 이동하는 공간일 뿐 사람들이 정을 붙일 만한 ‘장소’가 아니어서 지역사회와의 연결도 희미하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드라마는 몇가지 설정을 보강했다. 첫째는 지하철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한 연쇄살인사건을 큰 줄기로 깐다. 물론 수사는 광역수사대의 몫이지만, 남몰래 살인범을 쫓는 주인공을 내세워 연쇄살인사건이 주는 극적 긴장감을 활용한다. 둘째는 지경대의 생소함과 사소함을 오히려 소재로 삼는다. 가령 “순찰차 없어. 우린 지하철 타고 다녀”라고 말하거나, 흉기를 든 범인과 맞닥뜨렸을 때 112를 누르려는 고지석의 모습은 웃기면서 처연하다. 셋째는 지하철 공간을 특별한 의미와 경험이 깃든 ‘장소’로 만들어낸다. ‘덕후’처럼 모든 역의 특징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주인공의 능력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비장소’인 전철역을 흥미로운 ‘장소’로 느끼게 한다. 또한 지하철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도 지하철을 정겨운 ‘장소’로 보이게 한다.
흔히 지하철을 ‘시민의 발’ 혹은 ‘서민의 발’이라 말한다. 전자는 보편성을 말하지만, 후자는 계층성을 말한다. 영화 <기생충>의 “지하철 타고 다니는 사람들한테 나는 냄새”라는 대사는 후자를 의미한다. 반지하에 살지 않더라도,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 서민이다. 드라마는 지경대가 맞닥뜨리는 생활 밀착형 사건들을 통해 서민의 삶과 정서를 보여준다. 출근길 여성을 불법 촬영하여 인터넷에 유포하고, 강간 모의 후 납치하는 장면은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른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평범한 여성들이 얼마나 쉽게 범죄의 먹잇감이 될 수 있으며, 현행 법체계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그 피해에 비해 얼마나 사소하게 취급되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라 말하는 뻔뻔한 범죄자에게 “사람 죽였어. 이거 인격살인이라고”라며 받아치는 유령의 대사는 그래서 참 인상 깊다. 또한 드라마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데이트 폭력이 높은 재범률과 은폐되기 쉬운 속성을 지닌 심각한 범죄임을 환기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지경대의 협조를 얻어 총 2년간 취재했으며, 1년간 프로파일러의 자문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언뜻 사소해 보이는 지하철 내 사건들이 강력사건과 연결되는 모습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지하철 택배를 이용해 마약을 운반하거나 지하철 상인들을 괴롭히던 악질 대부업자가 채무자를 협박해 살인을 청부하는 모습은 섬뜩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범죄의 극악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힘을 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데 진력한다. 딸이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부지런히 택배를 운반하는 할아버지나, 부족한 아버지일망정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다 끝내 한강 다리에 오른 남자의 눈물은 먹먹하다.
지경대는 지하철 행상이 불법임을 알면서도 단속하지 않는다. 이들도 힘겨운 오늘을 버텨내는 생활인들이며, 행상인의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누군가에겐 위로의 선율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지하철 계단을 밟아 내려오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든 이에게 응원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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