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선임기자 노벨상 결과가 나오는 10월 초가 되면 문학 담당 기자는 바빠진다. 수상이 유력한 작가들에 관한 자료를 챙기고, 전문가의 코멘트나 기고문을 미리 받거나 예약해 놓아야 한다. ‘유력’하다고는 해도 믿음직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기자들이 의지하는 거의 유일한 정보가 영국 도박업체가 주관하는 베팅 확률이다. 기자들은 이 업체의 베팅 순위를 참조해서 몇몇 작가의 수상 기사를 미리 써놓기도 한다. 예측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은 미리 써놓은 기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나 역시 10년 가까이 예비 기사를 축적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아무개 버전의 노벨상 수상 작가’가 벌써 10명 남짓에 이른다. 올해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이달 4일 올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대신 내년에 수상자 두 사람을 발표한다니 내년에 할 일이 배로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한숨 돌렸다는 기분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지 않기는 2차대전 기간인 1940~43년 이후 무려 75년 만이다. 이렇듯 전쟁에 버금가는 ‘비상사태’를 초래한 것은 심사위원인 한림원 회원의 남편이 연루된 ‘미투’ 성추문, 그리고 역시 그에게 혐의가 가는 심사 결과 유출 의혹이다. 개인의 일탈이긴 하지만, 스웨덴 한림원과 노벨문학상의 권위와 신뢰에 커다란 손상이 초래된 것은 분명하다. 손상된 권위와 신뢰가 1년의 ‘자숙 기간’으로 완전히 회복될지도 미지수다.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새로운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노벨문학상 없는 세상’이라는 상상 말이다. 노벨문학상이 아예 없어진다면? 사실 올해의 수상 연기 결정과는 무관하게 노벨문학상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줄기차게 있어왔다. 언어를 질료로 삼는다는 문학의 특성은 음악이나 미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술적’ 어려움을 초래한다. 심사위원들이 모든 언어에 통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심사위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된 작품은 불가피하게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적잖은 훼손과 왜곡이 일어난다. 그것은 번역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문학 번역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번역 과정에서 누락되는 ‘어떤 것’이야말로 문학의 알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노벨문학상 심사는 ‘반칙’이다. 노벨문학상 역대 수상자 목록은 압도적으로 유럽어 작가들에게 쏠려 있다. 언어 사용자 수에 비해 북유럽 작가들의 수상 비율도 터무니없이 높다. 그 목록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이른바 ‘소수 언어’ 사용자들에게 부당한 열패감을 불러일으킨다. 상을 만든 노벨의 의도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이 없어진다고 아쉬워할 사람은 많지 않다. 수상을 바랐던 몇몇 작가들, 그 작가들의 책을 낸 출판사들, 그리고 베팅에 참여한 도박꾼들 정도가 아쉬워할까. 노벨문학상이 아니더라도 좋은 문학작품이 창작되고 번역되어 읽히는 데에 별다른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좋은 작가들의 명단을 우리는 충분히 지니고 있다. 문학상이 필요하다면, 특정 언어로 대상을 국한함으로써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거나, 아니면 여느 상과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과 지향을 지닌 상이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어 작품을 대상으로 한 상으로 범위를 좁히는 게 바람직하다. ‘노벨문학상 없는 2018년’이라는 기정사실로부터 ‘노벨문학상 없는 세상’이라는 신세계로,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이 문학적 상상력의 도약을 감행해보길 꿈꿔본다. bong@hani.co.kr
칼럼 |
[최재봉의 문학으로] 노벨문학상 없는 세상 |
책지성팀 선임기자 노벨상 결과가 나오는 10월 초가 되면 문학 담당 기자는 바빠진다. 수상이 유력한 작가들에 관한 자료를 챙기고, 전문가의 코멘트나 기고문을 미리 받거나 예약해 놓아야 한다. ‘유력’하다고는 해도 믿음직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기자들이 의지하는 거의 유일한 정보가 영국 도박업체가 주관하는 베팅 확률이다. 기자들은 이 업체의 베팅 순위를 참조해서 몇몇 작가의 수상 기사를 미리 써놓기도 한다. 예측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은 미리 써놓은 기사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나 역시 10년 가까이 예비 기사를 축적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아무개 버전의 노벨상 수상 작가’가 벌써 10명 남짓에 이른다. 올해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이달 4일 올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대신 내년에 수상자 두 사람을 발표한다니 내년에 할 일이 배로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한숨 돌렸다는 기분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지 않기는 2차대전 기간인 1940~43년 이후 무려 75년 만이다. 이렇듯 전쟁에 버금가는 ‘비상사태’를 초래한 것은 심사위원인 한림원 회원의 남편이 연루된 ‘미투’ 성추문, 그리고 역시 그에게 혐의가 가는 심사 결과 유출 의혹이다. 개인의 일탈이긴 하지만, 스웨덴 한림원과 노벨문학상의 권위와 신뢰에 커다란 손상이 초래된 것은 분명하다. 손상된 권위와 신뢰가 1년의 ‘자숙 기간’으로 완전히 회복될지도 미지수다.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새로운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노벨문학상 없는 세상’이라는 상상 말이다. 노벨문학상이 아예 없어진다면? 사실 올해의 수상 연기 결정과는 무관하게 노벨문학상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줄기차게 있어왔다. 언어를 질료로 삼는다는 문학의 특성은 음악이나 미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술적’ 어려움을 초래한다. 심사위원들이 모든 언어에 통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심사위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된 작품은 불가피하게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적잖은 훼손과 왜곡이 일어난다. 그것은 번역가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문학 번역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번역 과정에서 누락되는 ‘어떤 것’이야말로 문학의 알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노벨문학상 심사는 ‘반칙’이다. 노벨문학상 역대 수상자 목록은 압도적으로 유럽어 작가들에게 쏠려 있다. 언어 사용자 수에 비해 북유럽 작가들의 수상 비율도 터무니없이 높다. 그 목록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이른바 ‘소수 언어’ 사용자들에게 부당한 열패감을 불러일으킨다. 상을 만든 노벨의 의도가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이 없어진다고 아쉬워할 사람은 많지 않다. 수상을 바랐던 몇몇 작가들, 그 작가들의 책을 낸 출판사들, 그리고 베팅에 참여한 도박꾼들 정도가 아쉬워할까. 노벨문학상이 아니더라도 좋은 문학작품이 창작되고 번역되어 읽히는 데에 별다른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좋은 작가들의 명단을 우리는 충분히 지니고 있다. 문학상이 필요하다면, 특정 언어로 대상을 국한함으로써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거나, 아니면 여느 상과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과 지향을 지닌 상이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어 작품을 대상으로 한 상으로 범위를 좁히는 게 바람직하다. ‘노벨문학상 없는 2018년’이라는 기정사실로부터 ‘노벨문학상 없는 세상’이라는 신세계로,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이 문학적 상상력의 도약을 감행해보길 꿈꿔본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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