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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3 18:02 수정 : 2019.06.13 19:18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바야흐로 벌레의 계절이다. 숲과 산에서는 줄에 매달린 애벌레들이 길을 막고, 밤이면 방충망에 들러붙은 날것들이 웅웅거리며 들어올 틈을 노린다. 앞선 영화에서 바퀴벌레 식량을 선보였던 감독은 인간을 기생충에 견준 영화로 프랑스에서 상을 받고, <개미>의 프랑스 작가는 신작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개미>가 인간과 벌레의 공존을 모색했다면 영화 <기생충>은 벌레가 되어서야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어떤 인간들을 보여준다. 영화 첫 장면에서 기택(송강호)네 반지하방에 출몰하는 꼽등이는 기택과 그 식구들의 거울상과 다름없다. 클라이맥스 직전 장면에서 기택의 딸 기정(박소담)이 박 사장(이선균)네 고급 주택을 ‘접수’한 자기 가족을 바퀴벌레에 견주는 것을 보라.

벌레로 변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프카의 <변신>일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잠을 깨어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바뀐 것을 알게 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일과 삶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처지를 상징한다.

김영현의 단편 <벌레>는 카프카의 <변신>을 한국 현실에 접목시킨 문제작이다. 소설 주인공은 학생운동 시절 구치소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완전한 그리고 다소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 버린” 경험을 들려준다. 박정희의 체육관 선거에 맞서 옥중 투쟁을 벌이던 그는 방성구(防聲具)와 수갑으로 입과 손이 결박된 채 ‘먹방’으로 불리는 징벌방에 갇힌다. 가려움증은 벽의 모서리에 몸을 비비는 것으로 해결했다지만, 생리 현상은 어쩌지 못해 바지를 입은 채 볼일을 보고 만다. 그 순간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떠올린 주인공은 자신이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입에선 끊임없이 개처럼 질질 흘려대고 있는 침, 질퍽하게 오줌을 싸놓은 옷, 손을 뒤로 묶여 팔이 없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는 지금의 형상이 그들을 놀라게 하고 미치게 하고 말 것이었다.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싶었다. 이를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 단편 <벌레 이야기>는 애도와 용서의 권리조차 절대자에게 양도해야 하는 인간의 벌레 같은 처지를 문제 삼는다. 유괴범에게 어린 아들을 앗긴 엄마는 슬픔과 분노, 복수 의지를 신앙의 힘으로 다독이며 가해자를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지만,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께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가해자의 뻔뻔함 앞에 무력감과 절망을 맛본다. 이 소설은 1981년에 처음 발표되었고 그 전해에 있었던 중학생 납치 살해사건에서 동기를 얻었다는데, 작가는 광주학살 이후 가해자가 먼저 용서와 화해를 거론하는 데 대한 절망과 분노를 소설에 담았다고 밝힌 바 있다.

백민석의 짧은 장편 <해피 아포칼립스!>는 봉준호 감독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이 전해질 무렵에 나왔는데, 여러모로 영화 <기생충>과 함께 논할 만하다. 근미래의 서울을 배경 삼은 이 소설은 최상류층 거주지인 타운하우스 주민들과 낙오자들인 좀비족, 늑대인간족, 뱀파이어족의 충돌을 그린다. <기생충>에서 마주친 박 사장네와 기택네의 계급 대립을 극단화한 구도라 하겠다. “돌연변이를 일으켜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는 좀비·늑대인간·뱀파이어족의 생존술은 기택네 가족의 기생 작전을 떠오르게 한다. 한강변 난민촌에 사는 이들이 풍기는 “제 살던 나라의 고유한 악취, 제 인종의 독특한 체취”는 박 사장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에 대응한다. 여기서도 냄새는 계급 구별과 배제의 척도가 된다.

<기생충>과 <해피 아포칼립스!>가 둘 다 극적인 파국으로 마무리된다는 결말도 비슷하다. “인간 가족이 살기에도 지구는 좁아”라고 백민석 소설 속 부자 인간이 말할 때,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하층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기생충>을 보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 찜찜한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반지하방이나 옥탑방에 살거나 살았던 자신이 한갓 벌레가 된 듯한 불쾌감과 우울함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알고 보면 개미나 벌, 나방은 물론 몸속 기생충조차도 나름의 역할과 기능이 없지 않다. 개미나 벌과도 공존을 모색하는 마당에 같은 인간을 혐오스러운 벌레 취급 해서야 되겠는가.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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