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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24 20:37 수정 : 2016.05.27 10:59

강명관의 고금유사

이따금 고등학교에 강연을 하러 갈 때가 있다. 저녁 7시 이후다. 학생들은 강연을 들으려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 남아 있는 시간에 강연을 듣는다. 저녁식사 후 학교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위해서다. 자기 판단으로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서 밤 9시를 넘어서까지 학교에서 남아 있단다.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나 자기 성찰, 인간적 성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지루한 ‘학습노동’일 뿐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 그것은 강제된 노역일 뿐이다. 청춘의 펄펄 끓는 에너지를 지닌 고등학생이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는 것이 정말 학생 개인의 자율적 판단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타율이고, 강제의 결과다. 이 강제된 노역에 ‘자율’이란 말을 붙이는 발상은 정말 ‘창조적’이다. 이렇듯 난세의 언어는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정반대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

타율이란 정반대의 뜻을 갖게 된 이 난세의 어휘는 대학에도 널리 쓰인다. 교육부가 대학 총장 선출제도를 직선제에서 복권추첨식에 가까운 간선제로 바꾸지 않으면 재정적, 제도적 불이익을 주겠다고 한 것은 명백한 강요다. 직선제냐 아니냐를 선택하는 것은 대학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것은 또 대한민국의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애당초 교육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공문을 보내어 직선제 요소가 조금이라도 남은 제도를 유지한다면, 재정적·제도적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시종일관 협박해 왔다.

힘센 갑과 약한 을이 있다. 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자식을 굶길 수도 있고 먹일 수도 있다. 내 요구를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라.” 을이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갑의 요구를 따른다면 그것을 자율적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협박에 굴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립대학들이 직선제를 포기한 것 역시 재정 지원을 무기로 삼은 교육부의 협박에 굴복한 것일 뿐이다. 자율적 판단이 아니다.

국회에서 그 문제를 따져 묻는 의원이 있으면 교육부는 직선제를 폐기한 것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해 왔다. 협박으로 대학의 자율성을 강탈하면서 ‘자율’이란 어휘를 태연히 내뱉어 온 것이다. 하기야 강요된 타율학습을 자율학습으로 부르는 것이 이 나라 교육계의 언어습관이니 굳이 따지고 드는 것조차 부질없기는 하다만.

정말 난세는 난세다. 권력을 갖고 갑질을 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이제 한국말의 뜻조차 뒤바꾸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 자로(子路)는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왕이 선생님을 등용한다면, 무슨 일을 먼저 하고자 하십니까?” 공자는 먼저 “말을 바로잡겠다”고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갑이 아닌 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말의 뜻을 정확히 살피고 바로잡는 것이다. 예컨대 ‘고용 유연화’ ‘노동시장 유연화’란 미끈한 말을 들으면 “마음대로 해고해 버리겠다”는 말로 알아들고, 그 말을 ‘일방적 해고’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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