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0.20 20:16
수정 : 2016.10.20 20:49
강명관의 고금유사
백광현(白光玹)은 원래 무예를 익혀 왕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의 장교가 되었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의원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활터에 나가서 활을 쏘다가 짬이 나면 주머니에서 침을 꺼내 갈았다. 동무들이 “너 사람 죽이려고 그러느냐?” 하고 놀리면, “너희들 앞으로 내게 살려달라고 할 거야.”라고 되받았다.
세월이 흐르자 그의 침술은 정심해졌고 특히 종기 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의원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백광현은 그를 찾아온 절름발이를 고쳐주었다. 얼마 전까지 절뚝이던 병자가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찾아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1663년 어의(御醫)로 추천한 이래 백광현은 현종·숙종 연간 30년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숙종의 종기를 치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새로운 종기 치료법을 창안하는 등 그는 당대 최고의 신의로 평가받았다. 숙종은, 그가 강령현감에 제수되자 서울과 멀다 하여 포천현감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더 가까운 금천현감(금천현은 지금의 금천구)으로 옮겨주었으니, 의원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백광현이 어의로서 왕의 병을 보살핀 인물에 그쳤다면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의에 그치고 만 사람이 아니었다. 의원으로 최고로 출세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재물을 가볍게 보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의술을 가지고 교만을 떨지 않았다. 돈 많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병이 들어 그의 집으로 찾아와도 특별히 대우해 주는 것도 없었다. 그는 오직 병의 경중만을 볼 뿐이었고,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관리의 정복을 입고 거리를 지날 때 거지와 가난한 이가 다가와 자신의 병을 말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진찰해 보살폈고 조금도 싫어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는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쓴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를 풀어 쓴 것이다. 굳이 그를 ‘백지사’라 한 것은 그가 지중추부사 벼슬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현명은 소론의 명문가 출신으로 영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지체로 따지면 조선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지체가 현저히 떨어지는 의원 백광현의 묘표를 쓰며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백경현이 인술을 펼치는 진정한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의술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된다. 병든 이를 치료하는 사람, 곧 의원은 그 공감의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큰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아수라의 세상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희한한 사태를 목도하게 된다. 경찰이 쏜 물대포가 백남기 선생의 사인이라는 것은 따질 것도 없는 사실이건만, 대한민국 제일가는 병원의 의사는 사인을 굳이 ‘병사’라고 고집한다. 게다다 경찰은 또 부검을 하자고 덤빈다. 우습다. 나는 지록위마(指鹿爲馬)란 말이 흘러간 옛날의 고사성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사례가 21세기에도 있을 줄이야.
21세기 지록위마의 의원을 보고 백광현을 떠올린다. 어의가 되어도 소외된 이들을 지성으로 살피던 의원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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