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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05 19:53 수정 : 2018.07.05 20:10

[책과 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이슬람교 혹은 이슬람교도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고 난 뒤부터일 것이다(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은 아랍 사람으로 추정될 뿐 이슬람교도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곧 1270년 고려가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와 몽고(元) 양국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자, 원 제국 하의 이슬람교도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 2년(1275) 윤3월 원에서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阿室迷里)를 파견해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하게 하였다는 기사 이후 <고려사>에는 회회인, 곧 이슬람교도에 대한 언급이 더러 보인다. 예컨대 충렬왕 5년(1279) 10월에는 여러 회회가 왕을 위해 새로 지은 궁전에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고려 가요 ‘쌍화점’은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로 시작되는데, 이 노래는 충렬왕 때 만든 노래라고 한다. 곧 충렬왕 시기(1274~1308)에는 이슬람 상인이 개경에 와서 만두가게를 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자료로 적지 않은 회회인들이 한반도로 들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에 정착하는 사람이 나왔던 것은 물론이다. 충선왕 2년(1310) 10월 평양부윤에 임명된 민보(閔甫)는 다름 아닌 회회인이었다. 또 덕수 장씨(德壽張氏)의 시조 장순룡(張舜龍)도 회회인으로 1275년 고려에 귀화한 인물이라고 한다. 찾아보면 이런 사례는 상당히 많을 것이다.

조선에 들어오면 <태종실록> <세종실록>에 회회인에 대한 자료가 자주 보인다. 곧 이런저런 국가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회회노인’이란 필시 이슬람교 성직자일 것이다. 이런 자료로 보아 고려 충렬왕 이후 한반도에 들어온 회회인들은 적어도 조선 세종 연간까지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427년(세종 9) 9월4일조 <세종실록>이 그 답일 것이다. 같은 날 예조는 세종에게 이렇게 청한다. “회회의 무리는 의관이 아주 달라 사람들이 모두 보고서는 ‘우리 족속’이 아니라고 하고, 그들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의 인민(人民)이 되었으니, 유별나게 굴지 않고 우리의 의관을 따른다면, 저절로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또 큰 조회(朝會) 때 회회의 송축하는 예(禮)를 올리는 것도 또한 폐지하소서.” 이슬람교도에게 조선의 풍속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국가 의식에서 이슬람교 의식을 공식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제도적 억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이후 모든 자료에서 이슬람교도에 대한 언급은 사라진다.

세종조 문화의 창조성은 1270년 이후 원 제국을 통한 개방적인 문화적 수용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적어도 15세기 말까지 한반도는 문화적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문화에는 당연히 이슬람 문화도 포함될 것이다. 근자에 문제가 되고 있는 제주도의 예멘 난민을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해방 이후의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촛불혁명까지 이루어낸 나라다. 보다 개방적이고 관대해질 필요는 없을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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