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2 05:01
수정 : 2019.11.22 20:12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개혁안을 들고나왔다. 첫째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 것, 둘째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판서도 모두 양인, 천인 중에서 골고루 맡게 할 것, 셋째 양반들에게도 군역(軍役)을 꼭 같이 부과할 것, 넷째 궁방(宮房)과 권세가의 농장을 몰수할 것, 다섯째 원래의 세금 외에 거두는 각종 잡세를 없앨 것, 여섯째 노비에게 노동을 시키지 말고 임금 노동자를 쓸 것, 일곱째 형벌제도를 완화할 것 등이다.
노비(천인)를 양인으로 만들어 신분적 차별을 없애란다. 그러면 당연히 정승, 판서도 양인이거나 천인이거나 모두 할 수 있다. 자연히 군역을 지지 않은 양반의 특권 따위는 없다. 왕의 피붙이(궁방)와 권력자들이 특권을 이용해 강점한 토지도 모두 토해 내야 할 것이다. 신분제가 없어졌으니 노비의 노동력 착취 대신 임금 노동자를 써야 할 것이다. 민중에게 가혹했던 형벌제도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선입견 없이 읽은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알려진 조선의 어떤 개혁안보다 철저하고 근본적이라는 것을 직감할 터이다. 이 개혁안이 현실화한다면 조선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초반에 이 대담한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공부를 많이 한, 시대의 현실을 고민한 이른바 실학자였던가. 아니다. 이 개혁을 주장한 주체는 다름 아닌 명화적(明火賊)이었다. 한밤중에 횃불을 들고 말을 탄 채 들이닥치는 강도 무리 말이다.
1629년 2월 사형을 당한 이충경·한성길·계춘·막동 등은 양민과 천민으로 구성된 명화적 집단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황해도 출신인 이들은 여진족의 준동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유민을 모아 군도집단을 이룬 뒤 강원도로 옮겨가 철원·평강 일대에 출몰하며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고 전한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 아지트를 마련한 이들은 이충경을 우두머리로 삼고, 내부 규약과 담당 부서 등을 만들어 대역(大逆)을 도모했다고 한다. 그 대역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서울에 쳐들어가 앞서 말한 것을 비롯한 15개 조의 사회개혁안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인조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들이 반역을 도모한 글이 너무나도 흉악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인조실록> 7년(1629) 2월27일). 과연 그런가. 우리가 보기에 이들의 반역서는 평등이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충경 등은 명화적이 아니라 사실상 조선의 혁명가였던 것이다!
역사학이 드러내어 알리지 않았을 뿐이지 한국의 역사에는 특권을 배격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민중의 투쟁이 있었다. 2016년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올해 서초동까지 이어지고 있는 촛불혁명은 그 바닥에 인간의 평등과 특권의 폐기를 기본가치로 담고 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사실 혁명가 이충경의 후예들인 셈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충경과 달리 촛불시민들은 자신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더디다고 좌절하지 말자!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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