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0 06:01
수정 : 2019.12.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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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8일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고공농성을 하던 경북 구미산업단지 스타케미칼의 모습.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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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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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8일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고공농성을 하던 경북 구미산업단지 스타케미칼의 모습.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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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5월22일의 일이다. 중종이 신하를 불러 정무를 논하고 있는데,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금속성의 징소리도 섞여 있었다. 중종이 즉시 잡아들이라 명했으나 병조판서 김극핍은 한참 뒤 빈손으로 돌아왔다. 왕이 언성을 높이자 답인즉 징을 치는 자가 종학(宗學) 건물 앞의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군사 서넛을 보내 활을 쏘는 시늉을 한다면 겁을 먹고 내려올 것이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 승지가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승지의 말에 의하면 나무 위에 윤좌와 이후손, 나무 아래에는 양걸이란 사람이 있었다. 설득 끝에 윤좌와 이후손이 내려왔고 이들은 양걸과 함께 승정원으로 가서 자신들의 사연을 토로했다. 윤좌는 원래 전지(田地)에 관한 일로 도형(徒刑)을 산 바 있는데, 소송 상대방의 모함으로 이번에 함경도 입거(入居, 강제 이주) 대상에 뽑혔다는 것이었다. 이중처벌이라는 것이다. 양걸은 토지 구매 문서가 명백히 있는데도 남의 토지를 빼앗았다는 혐의를 쓰고 역시 입거 대상에 뽑혔다고 하였다. 이후손은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역시 입거 대상에 올랐다고 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함경도로 백성을 옮기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익숙한 땅을 떠나 여진족이 수시로 들이닥치는 낯선 땅으로 가서 논밭을 새로 일구려 하겠는가? 자원자가 있을 리 없으니, 정부에서는 죄가 있는 사람을 뽑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춥고 거칠고 낯선 땅으로의 이주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입거는 자신의 삶을 깡그리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윤좌는 엿새 전 신무문 밖 소나무에 올라가 징을 쳤다. 하지만 자신의 사연을 말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도리어 장(杖) 80대를 맞았다. 이후손은 중종의 거둥 때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억울함을 밝힌 소장을 올렸다가 장 80대를 맞았다. 그는 또다시 근정전에서 북을 쳤고 그 일로 또 장 100대를 맞았다. 이쯤 되면 그만둘 만도 한데 이후손과 윤좌 두 사람은 다시 나무에 올라가 몸을 묶은 채 징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던 것이다.
조선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북을 쳐서 왕에게 알리라고 신문고(申聞鼓)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궐 안에 있는 신문고를 어느 백성이 함부로 칠 수나 있었을 것인가? 그래서 왕이 지나는 길에 징을 들고 있다가 쳐서 왕의 주의를 끌고 억울한 사연을 토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별무소용이었다. 쓸데없는 일로 왕의 귀를 시끄럽게 했다고 매를 맞기 일쑤였던 것이다. 윤좌와 이후원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할 수 없이 가혹한 처벌이 있었다. 윤좌와 이후손은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왕의 귀를 시끄럽게 했던 죄다!(양걸에 대한 판결은 알 수 없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의 사연을 호소하는 분들이 있다. 이른바 고공농성이다. 사회적 약자가 기성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 택하는 최후의 방법인 것이다. 곧 새해다. 새해에는 그분들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시기를! 모쪼록 고공농성과 같은 낱말 자체가 사라진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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