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사후 25년 뒤 북한체제의 근간인 반미 이데올로기와 핵을 등에 짊어지고 노마드적 ‘대장정’에 나섰다. ‘대장정’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 시련을 극복하는 인내와 용기야말로 진정한 노마드가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소설가 평양을 출발,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베트남에 이르는 김정은 위원장의 66시간 ‘열차 대장정’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나에게는 밀도 높은 ‘노마드’적 퍼포먼스로 보였다. 특정한 가치와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깨뜨림으로써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창조적 인간을 일컫는 노마드(Nomad·유목민)는 들뢰즈에 의해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아탈리에 의해 역사와 문명의 변혁 주체로 그 의미가 확대 심화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5시간이면 갈 수 있는 항공편을 버리고 66시간이 소요되는 ‘열차 대장정’을 선택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자본주의적 인식을 호쾌하게 깨뜨린 노마드적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열차 대장정’에서 우리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66시간이 품고 있는 대륙 공간의 의미다.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이 나오자 북한 땅이 열리면 철도로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국민 사이로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베트남으로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이번 ‘열차 대장정’을 통해 제대로 알려졌다. 대륙의 기점인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우리가 70년 동안 ‘갇힌 땅’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열차 대장정’이 환기한 것이다. 땅이 갇히면 몸만 갇히는 게 아니다. 정신도 갇힌다. 분단과 참혹한 전쟁을 겪은 후 남한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북한은 반미 이데올로기로 강력한 국가권력을 구축하면서 국민의 정신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감금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틀 전인 2월25일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식민과 전쟁, 분단과 냉전으로 고통받던 시간에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주도하는 시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우리 손으로 넘기고 있다”고 하면서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전쟁과 대립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진영과 이념에서 경제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신한반도 체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한반도 상황을 염두에 둔 노마드적 비전이다. 여기에서 2017년 4월의 한반도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호주로 향하던 칼빈슨 항공모함이 4월9일 항로를 돌연 한반도로 변경했다.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도 한반도 근해에 대기 중이었다. 서태평양 주변의 미 전략 자산들이 속속 한반도 주변으로 재배치되는 상황이 이어지자 한반도 전쟁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2018년 11월 한미연합사령관직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브룩스 전 사령관이 퇴역 후 처음으로 한 언론 인터뷰에서 “2017년 4월 북한과 미국이 전쟁 위기에 근접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근접했다”고 답변하면서 “당시 대화가 없던 상황에서 북-미 양쪽은 상대의 어떤 행동이든 전쟁으로 갈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었고, 당시에 주한미군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노마드적 상황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철저한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에서 노마드는 오랫동안 출현하지 않았다. 북한 특유의 수령체제가 노마드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노마드적 모습은 예기치 않은 시기에,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2018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야 하며, 남조선의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에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 후 남북한의 평창올림픽 개막식 동시 입장을 시작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담대한 노마드가 문재인 대통령의 담대한 노마드와 만나 판문점에서 두차례 남북 정상회담으로 1차 북-미 정상회담을 견인한 후 평양에서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했고, 그 과정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만들어냄으로써 남북한은 물론 동북아 질서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탈리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노마드는 모든 재산을 걸머지고 이동한다. 1953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위태로운 권력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수령체제까지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반미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의 손자인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사후 25년 뒤 북한체제의 근간인 반미 이데올로기와 핵을 등에 짊어지고 노마드적 ‘대장정’에 나섰다. ‘대장정’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 시련을 극복하는 인내와 용기야말로 진정한 노마드가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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