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간독(簡牘)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 글을 쓰는 데 사용하는 대쪽이나 얇은 나무쪽을 이르던 말이다. 간(簡)은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것이고 독(牘)은 나무를 쪼개어 만든 것으로, 길고 납작한 모양의 표면에 붓과 먹으로 글을 쓴다. 일반적 크기의 간독 하나에 30~40개의 글자를 쓸 수 있다. 글자의 크기를 줄이면 50자까지도 가능하다. 이 간독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이 되었다. 공자가 읽었던 <주역>은 간독 책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부터 2세기까지 700년가량을 간독 시대로 본다. 간독 시대의 기자(記者)들은 글자를 잘못 쓰면 칼로 긁어낸 후 다시 써야 하므로 한자 한자 전각하듯 썼을 것이다. 그들은 문장에 살을 붙여 엿가락 늘이듯 늘리거나 문장을 비틀지 않았다. 간독의 한정된 면적과 무게 때문이다. 간독은 종이처럼 펼칠 수 없고, 무게도 종이보다 훨씬 무겁다. 책은 무거울수록 그만큼 불편해진다. 간독에 새겨진 글과,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실체 사이의 거리가 종이의 글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그들이 나에게는 장인처럼 보인다. 자신이 만드는 것을 생명체로 느끼는 사람이 장인이다. 간독 시대의 기자들에게 글은 귀하고 소중한 생명체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생명체가 훼손되고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언어 공간이 급속도로 팽창했고, 인쇄술의 발전으로 언어들의 체계적 집합체인 책을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젠가부터 디지털 언어까지 등장하여 그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불과 글>에서 “책 한권이 한장으로 이루어진 두루마리가 페이지가 있는 책으로 바뀌면서 세계는 좌와 우의 페이지로 잘려졌고, 그 결과 두루마리 독서로 체험했던 세계에 대한 연속적 감각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책을 화면으로 바꾼 디지털 언어 환경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강력히 환기한다. 인류가 까마득한 세월 동안 역사를 등에 짊어지고 쉼 없이 유랑하는 동안 언어라는 생명체도 인류와 함께 유랑을 거듭했다. 그 유랑 속에서 간독 시대의 언어, 그 원초적 언어의 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감벤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지만 글은 불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불은 인류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은유인데, 나는 ‘불’을 ‘원초적 언어의 혼’으로 읽는다. 그런데 사라져버린 ‘원초적 언어의 혼’을 어떻게 불러들인다는 말인가? 아감벤은 회상이라고 속삭인다.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회상은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행위다. 회상이 부재한 철학과 문학은 본질의 영역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아감벤의 생각이다. 책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 기억들 속에는 인류가 겪은 무수한 사건들과 그 사건을 잉태한 무수한 원인들이 저마다 고유한 형태를 이루며 역동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진정한 회상은 그 기억들 속에서 ‘진정한 기억’을 섬세하게 가려낸다. 진정한 기억 속에는 그전의 진정한 기억이 깃들어 있다. 진정한 기억들이 그렇게 사슬처럼 이어져 만들어내는 기억의 길 속으로 들어가면 저 너머 어디에선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일렁이는 ‘원초적 언어의 불’이 눈에 비칠 것이다. 우리는 언어 속에 산다. 언어 속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언어로 신과 인류를 향해 절대적 질문을 던지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질문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사유는 언어를 통해 육체를 획득한다. 지금 우리는 언어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글을 죽간과 나무에 새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지나 종이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글의 공간이 무한적으로 변해버렸다. 무한의 공간을 어지럽게 떠도는 언어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참해질 때가 많다. 진실을 표현한다는 언어들이 넘쳐흐르지만 정작 진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훼손할 뿐 아니라 갈기갈기 찢기까지 한다. 간독 시대의 장인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칼럼 |
[정찬의 세상의 저녁] 간독 시대의 언어 |
소설가 간독(簡牘)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 글을 쓰는 데 사용하는 대쪽이나 얇은 나무쪽을 이르던 말이다. 간(簡)은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것이고 독(牘)은 나무를 쪼개어 만든 것으로, 길고 납작한 모양의 표면에 붓과 먹으로 글을 쓴다. 일반적 크기의 간독 하나에 30~40개의 글자를 쓸 수 있다. 글자의 크기를 줄이면 50자까지도 가능하다. 이 간독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이 되었다. 공자가 읽었던 <주역>은 간독 책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부터 2세기까지 700년가량을 간독 시대로 본다. 간독 시대의 기자(記者)들은 글자를 잘못 쓰면 칼로 긁어낸 후 다시 써야 하므로 한자 한자 전각하듯 썼을 것이다. 그들은 문장에 살을 붙여 엿가락 늘이듯 늘리거나 문장을 비틀지 않았다. 간독의 한정된 면적과 무게 때문이다. 간독은 종이처럼 펼칠 수 없고, 무게도 종이보다 훨씬 무겁다. 책은 무거울수록 그만큼 불편해진다. 간독에 새겨진 글과,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실체 사이의 거리가 종이의 글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그들이 나에게는 장인처럼 보인다. 자신이 만드는 것을 생명체로 느끼는 사람이 장인이다. 간독 시대의 기자들에게 글은 귀하고 소중한 생명체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생명체가 훼손되고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언어 공간이 급속도로 팽창했고, 인쇄술의 발전으로 언어들의 체계적 집합체인 책을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젠가부터 디지털 언어까지 등장하여 그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불과 글>에서 “책 한권이 한장으로 이루어진 두루마리가 페이지가 있는 책으로 바뀌면서 세계는 좌와 우의 페이지로 잘려졌고, 그 결과 두루마리 독서로 체험했던 세계에 대한 연속적 감각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책을 화면으로 바꾼 디지털 언어 환경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강력히 환기한다. 인류가 까마득한 세월 동안 역사를 등에 짊어지고 쉼 없이 유랑하는 동안 언어라는 생명체도 인류와 함께 유랑을 거듭했다. 그 유랑 속에서 간독 시대의 언어, 그 원초적 언어의 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감벤은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지만 글은 불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불은 인류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은유인데, 나는 ‘불’을 ‘원초적 언어의 혼’으로 읽는다. 그런데 사라져버린 ‘원초적 언어의 혼’을 어떻게 불러들인다는 말인가? 아감벤은 회상이라고 속삭인다.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회상은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행위다. 회상이 부재한 철학과 문학은 본질의 영역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아감벤의 생각이다. 책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 기억들 속에는 인류가 겪은 무수한 사건들과 그 사건을 잉태한 무수한 원인들이 저마다 고유한 형태를 이루며 역동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진정한 회상은 그 기억들 속에서 ‘진정한 기억’을 섬세하게 가려낸다. 진정한 기억 속에는 그전의 진정한 기억이 깃들어 있다. 진정한 기억들이 그렇게 사슬처럼 이어져 만들어내는 기억의 길 속으로 들어가면 저 너머 어디에선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일렁이는 ‘원초적 언어의 불’이 눈에 비칠 것이다. 우리는 언어 속에 산다. 언어 속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언어로 신과 인류를 향해 절대적 질문을 던지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질문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사유는 언어를 통해 육체를 획득한다. 지금 우리는 언어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글을 죽간과 나무에 새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지나 종이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글의 공간이 무한적으로 변해버렸다. 무한의 공간을 어지럽게 떠도는 언어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참해질 때가 많다. 진실을 표현한다는 언어들이 넘쳐흐르지만 정작 진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훼손할 뿐 아니라 갈기갈기 찢기까지 한다. 간독 시대의 장인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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