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07 18:09
수정 : 2019.11.08 02:05
정찬ㅣ소설가
알바니아 출신의 망명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10월26일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2019 박경리문학상’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예술은 족쇄 같은 진리를 버리고 창조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았다”고 하면서 “알바니아 고원 지방에 통용되는 관습법 ‘카눈’의 복수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살인자는 희생자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희생자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장면은 극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불충분하다. 카눈의 드라마는 고대인에게 장례식이 삶의 극장이었던 것처럼 삶의 모든 요소를 하나로 엮는다”고 말했다.
카다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장편소설 <부서진 사월>을 읽어야 한다. 카다레의 소설은 모국 알바니아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지층에 뿌리내리고 있다. <부서진 사월>도 예외가 아니다. 작가는 알바니아의 옛 관습법 ‘카눈’의 복수극을 <부서진 사월>에서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브로 썼다.
소설은 26살 청년 그조르그의 살인으로 시작된다. 그조르그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들의 살인을 알린다. 얼마 후 “베리샤가(家)의 그조르그가 크리예키크가의 제프를 죽였다”는 외침이 마을 곳곳에 울려 퍼진다. 그조르그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 집안의 명예를 지키는 신성한 의무였던 것이다.
‘그자크스’(살인자)가 된 그조르그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희생자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할 미래의 ‘그자크스’는 누구일까를 생각한다. 그의 살인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자, 그의 조상들이 오랜 세월 동안 벗어나지 못한 복수극의 재현이다. 그가 ‘미움의 감정 없이, 오직 운명의 차가운 눈빛’만으로 살인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누대에 걸친 복수극의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올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례식이 끝나자 중재인이 희생자 가족에게 30일의 휴전을 요청하여 허락받는다. 그조르그는 그날로부터 4월17일 정오까지 희생자 가족의 복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장례식 이틀 후 그조르그는 자신이 살인자이며, 복수를 당할 희생자임을 알리는 검은 리본을 소매에 달고 ‘오르쉬 성’을 찾아 집을 떠난다. 카눈에 따르면 ‘그자크스’는 ‘피의 세금’을 바쳐야 한다. 오르쉬 성은 피의 세금을 받는 곳이다. 하지만 성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성으로 가까이 갈수록 성은 오히려 멀어진다. 성이라고 생각하여 다가가면 안개 덩어리일 뿐이다. 황량한 고원 마을을 떠돌면서 가혹한 운명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가는 그조르그의 모습을 카다레는 사실적, 알레고리적, 신화적 요소가 뒤섞인 입체적 문체로 조형한다.
<부서진 사월>이 문제적 소설인 것은 카눈의 ‘족쇄 같은 진리’에 갇힌 그조르그의 삶을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함께, 인간의 궁극적 폭력인 살인이 얼마나 덧없고 부조리한 행위인지를 아프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아픔은 그조르그가 4월17일 정오가 지난 시각 크리예키크가의 누군가가 겨눈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을 죽인 이가 바로 자신임을 느끼는 마지막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
“저 탑은 쉬크렐리가의 탑이고 그 뒤쪽은 크리스니크가의 탑이라오. 두 집안이 회수해야 할 피가 얽히고설켜 어느 집안이 복수할 차례인지 알 수 없어 두 집안 모두가 자신들의 탑 속에 틀어박혀 있다우.”
고원 마을 노파의 탄식에는 ‘진리의 독점’이 불러일으킨 오랜 폭력의 상흔이 켜켜이 서려 있다. 노파의 탄식을 듣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한반도의 비극적인 분단 상황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조르그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에는 두 집안의 마흔두개 무덤 가운데 스물두개의 무덤은 복수극이 낳은 것으로 ‘살인 직전에 쓴 비문(碑文)들과 말(言) 이상의 힘을 지닌 침묵’이 깃들어 있었다.
허리가 잘린 한반도를 떠돌면 헤아릴 수 없는 ‘비문들과 말 이상의 힘을 지닌 침묵’과 도처에서 마주친다. 알바니아의 평원이었던 코소보에서 인류사를 점철한 전쟁의 살육과 마주치듯. 세르비아의 권력자 밀로셰비치가 코소보 전쟁에서 저지른 인종 학살을 옹호한 페터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카다레가 비판한 것은 ‘족쇄 같은 진리’를 버리고 ‘창조라는 무거운 짐’을 정직하게 짊어진 예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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