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몇년 전에는 집단 괴롭힘과 일진 등 학교폭력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하고 모욕적인 폭력이 특히 중학생들 사이에 횡행했고, 몇몇 피해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자 정부와 교육 관계자들, 학부모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학교폭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년 전에 비해서는 좀 숙지근해진 상황이다. 당시 한 신문기자와 대화를 하다가 학교폭력이 이대로 없어지겠냐,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타인을 향한 폭력성이 금지되면 이제 아이들은 자신을 공격하게 될 것 같다고.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교육 폭력’과 인간의 본성인 공격성에 근거해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을 적용해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한겨레21> 1237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청소년의 자해 기사들은 예견된 고통을 눈앞에서 확인시켜주었다. 전체 중학생 51만명 가운데 자해 경험이 있는 아이가 4만5천명, 약 8%에 이른다고 한다. 조사에서 거짓말을 하고 자해 사실을 숨긴 아이들도 있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부모들)이 겪는 좌절과 힘겨움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거짓말을 침도 바르지 않고 하면서, 부모들은 아이의 삶을 틀과 갑 속에 욱여넣는다. 그 억압 아래에서 아이들은 선택과 결심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생명은 핏기를 잃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반건조 미라로 감각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살아 있음을 죽음에 근접하는 방식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공간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삶을 인지하거나 죽음을 각성하면서 살지 않는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활’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아이가 죽음과 삶, 그 두 극단에만 갇혀 있다.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지도 교류하지도 않으면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자해다. 아이들의 고통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성인이 되기 전에, 유년에 겪은 상처들이 치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삶에 가장 필요한, 주된 양식인 친구들이 허용되어야 한다. 부모보다, 대학보다, 성적보다, 더 좋은 스마트폰보다, 친구다. 내신이 앗아가고, 학원이 숨겨버린 그 친구들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을 나의, 우리의 아이들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나는 너희가 잘 놀고, 많이 놀고, 함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은 시간 동안 노래하고 춤추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치고 섹스하고,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혁명을 일으켜온 생명체다. 왜 우리는 잘 놀고 많이 놀면 안 되나. 그래서 친구는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어른들을 허용하지 말아라. 친구들과 놀아라, 오직 놀아라, 그저 놀아라, 그것이 너희의 사춘기를 치유의 시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너희도 다 괜찮다. 지금까지도 잘 살아남지 않았는가 말이다. 너희가 어떤 아이들이건 다 괜찮다. 너희는 우리의 아이들이니까.
칼럼 |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당신의 사춘기는 치유적인가 |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몇년 전에는 집단 괴롭힘과 일진 등 학교폭력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하고 모욕적인 폭력이 특히 중학생들 사이에 횡행했고, 몇몇 피해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자 정부와 교육 관계자들, 학부모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학교폭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년 전에 비해서는 좀 숙지근해진 상황이다. 당시 한 신문기자와 대화를 하다가 학교폭력이 이대로 없어지겠냐,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타인을 향한 폭력성이 금지되면 이제 아이들은 자신을 공격하게 될 것 같다고.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교육 폭력’과 인간의 본성인 공격성에 근거해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을 적용해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한겨레21> 1237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청소년의 자해 기사들은 예견된 고통을 눈앞에서 확인시켜주었다. 전체 중학생 51만명 가운데 자해 경험이 있는 아이가 4만5천명, 약 8%에 이른다고 한다. 조사에서 거짓말을 하고 자해 사실을 숨긴 아이들도 있다고 했으니,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부모들)이 겪는 좌절과 힘겨움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거짓말을 침도 바르지 않고 하면서, 부모들은 아이의 삶을 틀과 갑 속에 욱여넣는다. 그 억압 아래에서 아이들은 선택과 결심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생명은 핏기를 잃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반건조 미라로 감각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살아 있음을 죽음에 근접하는 방식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공간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삶을 인지하거나 죽음을 각성하면서 살지 않는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활’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아이가 죽음과 삶, 그 두 극단에만 갇혀 있다.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지도 교류하지도 않으면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것이 자해다. 아이들의 고통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성인이 되기 전에, 유년에 겪은 상처들이 치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삶에 가장 필요한, 주된 양식인 친구들이 허용되어야 한다. 부모보다, 대학보다, 성적보다, 더 좋은 스마트폰보다, 친구다. 내신이 앗아가고, 학원이 숨겨버린 그 친구들 말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을 나의, 우리의 아이들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나는 너희가 잘 놀고, 많이 놀고, 함께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은 시간 동안 노래하고 춤추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치고 섹스하고,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혁명을 일으켜온 생명체다. 왜 우리는 잘 놀고 많이 놀면 안 되나. 그래서 친구는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어른들을 허용하지 말아라. 친구들과 놀아라, 오직 놀아라, 그저 놀아라, 그것이 너희의 사춘기를 치유의 시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너희도 다 괜찮다. 지금까지도 잘 살아남지 않았는가 말이다. 너희가 어떤 아이들이건 다 괜찮다. 너희는 우리의 아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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