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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16 18:26 수정 : 2018.12.17 14:11

이승욱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한 아이가 있었다. 4학년에 올라간 첫 수학 시험에서 40점을 받았다. 엄마는 화를 내고 닦달을 했다. 아이도 엄마에게 미안해서 정신차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문학습지는 물론이고 학원도 다녔다. 다음 시험에서 아이는 80점을 받았다. 아이는 기뻐서 달려와 엄마에게 “엄마, 나 80점 받았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것 봐, 너 하면 되는데 왜 안 했어. 근데 왜 5개나 틀렸어. 너 정신 안 차리고 시험 쳤지?” 아이는 풀이 죽었지만, 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다음 시험에서 아이는 96점을 받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 아이는 신발도 채 벗지 않고 현관에 서서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 나 96점! 짜잔~.” 하지만 엄마는 냉담했다. 시험지를 낚아채 훑어보고는 “너 한개 이거 왜 틀렸어? 이거 전에 학습지에서 풀어본 문제잖아. 너 정말 정신 안 차릴래?” 아이는 엄마를 또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마음이 힘겨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공부한 그 아이는 기어코 다음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다. 이제는 정말 의심 없는 기쁨에 겨워 엄마에게 시험지를 내밀며 100점임을 알렸다. 이번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시험은 쉬웠던가보지? 너희 반에 100점 받은 애 몇명이야?”

공부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너로 인해 내가 만족했다’는 메시지를 결코 주지 않는 부모들에 대한 이야기다.

노모의 생일을 앞둔 지영(가명)씨는 또 마음이 무겁다. 지영씨가 사다드리는 물건을 엄마는 한번도 좋다고, 마음에 든다고 칭찬한 적이 없다. 비싼 화장품을 사다드리면 피부에 맞지 않는다 하고, 고운 색의 옷을 사다드리면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 한다. 고민 끝에 현금으로 드렸더니, 너는 성의도 없이 어미 생일에 고작 돈 몇푼 던지고 가냐고 강짜를 부렸다. 하지만 아직도 백수로 사는 남동생이 선물한 싸구려 립스틱 하나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쏙 드는 걸 사가지고 왔다며 우려먹는다. 명절이나 생일은 물론이고, 춥거나 더울 때면 신경써서 챙겨드리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지영씨가 사오는 것, 만들어 오는 음식 등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어렵사리 들어간 지방대학을 7년 만에 졸업하고 아직도 변변한 직장도 없는 아들은 세상에 없이 귀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지영씨가 부모님께 드린 용돈은 모두 그 아들에게 건너간다.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는 남동생과 달리 지영씨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존재 증명에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는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너로 인해 내 삶이 고통스럽고 엉망이 되었다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주면서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한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많은) 인간은, 좀 잔인한 이야기지만, 상대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주지 않는다. 그래야 그 상대를 더 손쉽게 통제하고 복속시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자식,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식에게 바로 그것을 주지 않으면 자식은 그것을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왜 자식들을 이렇게 복속시키려 할까? 답은 간단하다. 자식이 떠날까봐 두려워서다. 그래서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이 약한 부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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