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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9 16:45 수정 : 2019.06.10 13:31

카프카
“아버지가 제게 내리신 계율을 아버지 스스로가 지키시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비로소 (그 계율들은) 저를 짓누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소송한 아들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의 일부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식사자리에서는 떠들면 안 되고 음식 불평하면 안 되고 흘리면 안 되고 딴짓하지 말고 먹어야 한다고 해놓고, 정작 자신이 가장 음식 불평을 많이 하고 밥 먹으며 심지어 손톱을 깎고 식사가 끝나면 결국 자기 자리 밑에 가장 많은 음식 부스러기를 흘려 놓았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강제하는 계율들은 넘쳤지만 정작 그 계율을 가장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렇게 카프카는 아버지의 분열된 계율의 틈새에 끼여 ‘벌레’로 변신하는 환상으로 견디다가, 종당에는 몇번의 약혼과 파혼을 거쳐 미혼남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를 소송한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자신이 세운 계율을 스스로 어기며 사는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되겠다. 자녀들에게는 올바로 살라고 해놓고 편법, 비법, 관행 등의 이름으로 어기며 살아온 우리의 지난 삶들 말이다. 물론 장삼이사 아버지들의 소소한 잘못들은,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저지른 거대하고도 저 당당한 자기 배반에 비해 하찮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식들은 아버지의 수많은 소소한 자기 배반 때문에 분열된 삶으로 던져진다.

20세기의 카프카는 21세기에 다시 영화 <가버나움>의 자인으로 환생하는데, 레바논에 사는 12살로 추정되는 한 소년이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 고소한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그는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이슬람의 계율이 뭔지, 관습이 어떤지 필자는 잘 모른다. 하지만 완벽하게 현실과 똑같은 영화에서는 10살 남짓된 딸을 지참금을 받고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넘기고, 온갖 위험으로 득시글거리는 길거리로 자식들을 내몰아 돈벌이를 시킨다. 그러면서 정작 아버지는 물담배나 빨고 빈둥거리며, 신의 뜻만 찾는다.

자인은 말한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다고. 하지만 현실은 길바닥에 버려져 짓밟히고 벌레처럼 살아간다고 분노가 고갱이가 된 목소리로 담담히 말한다. 전문 배우도 아니고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증명서도 없는, 본명도 자인인 이 소년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재현했다.

한 세기 전이라고, 거긴 중동이라고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도 카프카와 자인의 아버지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나이는 60살쯤 된 성인이지만 실은 ‘늙은 유아’가 된 아버지들 말이다. 살아가면서 온전히 경험하고 통과했어야 할 무엇인가가 유실된 것 같다. 이런 아버지들은 무엇보다 자녀라는 존재가 품음직한 감정, 즉 아픔과 갈등, 포부와 한계, 불안과 허세 등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저 아버지 자신의 욕심을 자녀들이 현현해주기를 강제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왜 이들에게는 욕망에 휘둘리는 충동만 남았을까.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소년’이 없어졌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12살 소년, 자인의 모습이 우리 아버지들에게는 처음부터 없었을까.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고, 그만큼 존중하고 사랑하는 책임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던 그 소년의 소망은 아직도 아버지들 마음 어디에 웅크리고 있을 것 같다. ?청순하고 순결했던 그 소년들의 꿈이, 그때의 감성이, 그때 느꼈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설렘이, 완전히 소실돼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들이 그 ‘소년’을 다시 찾기에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욱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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